胡簡公(호간공) 李蓀(이손) 묘역 및 신도비

2019. 3. 22. 05:45뿌리를 찾아서/묘역 답사

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신월리산22-1
광주시 기념물 제9호

 

[묘역가는 길 입구쪽 高德閣(고덕각), 석탄공 비문, 신도비 전경]

 

제가 검색을 잘못하였는지 분명 주소를 보고 다녀왔는데...
다녀와서 포스팅해 올리려 지도를 올리려 검색을 해봐도 나오지 않는다.
'광주시 기념물 제9호' 라는데.... 왜 지도상에 나타나지 않는지 궁금하다.

 

[神道碑(신도비)]

[안내판과 신도비 와 高德閣(고덕각) 전경]

[안내판 글 내용]

 

이곳에서 안쪽으로 200m 더 들어가면 재실인 한산재와 고덕재 묘역이 있다.

 

[묘역 입구의 漢山齋(한산재) 전경]

[漢山齋(한산재) 일각문]

[漢山齋(한산재) 현판]

[담너머로 담은 漢山齋(한산재)]

 

재실인 漢山齋(한산재) 일각문이 닫혀 있어서 안으로
들어갈 수 없기에 담 너머로 漢山齋(한산재)의 모습을 담아 보았습니다.

 

[묘역으로 오는 길과 漢山閣(한산각) 전경]

[후손 묘와 뒤쪽 漢山閣(한산각) 전경]

[漢山閣(한산각) 현판]

[漢山閣(한산각) 전경]

[이손묘역 및 신도비 안내 글 내용]

[神道碑(신도비)]

 

1520년 건립된 이 비는 龜趺(귀부) 螭首(이수)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이 수 앞면에는 용 두 마리가 가운데의 여의주를 마주 올려다 보고 있는데,
雲紋(운문)에 감싸여 있고, 뒷면도 동일하며 측면에는 용 꼬리와 운문이 있다.


귀부는 거북머리가 앞을 직시하고 목의 주름이 굵게 하나가 접혀 있으며,
앞. 뒤 다리는 몸통에 부조형태로 刻(각)하여 붙였고, 꼬리도 왼쪽으로 들어 올렸다.

 

[뒤쪽에서 담은 漢山閣(한산각) 전경]

 

비의 마멸이 진행되고 있으나 판독이 가능하다.
영구 보존코자 현재는 신도비각에 옮겨 놓았다.

 

[漢山閣(한산각) 쪽에서 담은 묘역 전경]

 

세조 5년(1459)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학문은 물론
활쏘기, 말타기를 잘 하여 왕명으로 선전관이 되었다.
성종 1년(1470)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조정랑.
都摠府經歷(도총부경력)을 역임하고, 김해부사. 判校(판교)를 거쳤다.


1492년 장례원판결사, 이어 충청도. 함경도 절도사,
충청도. 황해도. 전라도 관찰사, 부제학·우부승지를 지냈다.
연산군 10년(1504) 한성부좌윤. 우윤, 이조. 예조참판을 거쳐,
형조.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돌계단으로 이어지는 묘역으로 오르는 길]

 

중종 1년(1506) 중종반정 때 공을 세워 정국공신
3등으로 漢山君(한산군)에 봉하여지고, 우참찬으로 승진하였다.


1508년 좌참찬 재임시 才德(재덕)이 없고 늙음을 핑계로
致仕(치사)를 요청하였으나 几杖(궤장)을 하사받고 그대로 유임되었다.
그 뒤 우찬성. 좌찬성을 역임하고, 1512년
일본의 和好(화호) 요청을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1513년 漢山府院君(한산부원군)에 진봉되고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만년에는 영의정 柳洵(유순), 판서 安琛(안침) 등
南學(남학)의 친우들과 九老會(구로회)를 만들어 서로 왕래하며 즐겼다.
시호는 胡簡(호간)이다.

 

[좌측 李蓀(이손) 묘 우측 부인 경주이씨 묘]

 

조선전기 학자인 이손의 묘소이다.
李蓀(이손, 1439~1520) 본관 廣州(광주) 자, 子芳(자방),
초명 蓂(명)이었는데 세조가 蓀(손)으로 바꾸어 주었으니 그만큼 신임이 두터웠다.


묘소는 15세기 묘제에서 성리학의 영향을 받아 16세기 전반기에
새로운 유형의 묘제를 시험하던 시기에 조성되어 다른 봉분에 비해
특이하게도 7각 형태를 보이고 있다.

 

[墓碑(묘비)]

 

조선 중기에 건립된 碑座荷葉(비좌하엽)의 묘비가
각각 1기씩 있으며 조선 중기에 제작된 정경부인 경주이씨의
묘비 4편은 碑座荷葉(남곤)이 묘비명을 지었으며, 金魯(김노)가
白磁(백자)편에 글씨를 썼다.


이손 선생의 묘역은 백대리석의 묘비도 눈에 띄지만, 7각형의 묘가 더 특이합니다.

[좌우 文人石(문인석)]

[이손 묘 앞에서 담은 한산재와 고덕재 전경]

 

묘역과 신도비는 광주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손 묘뒤쪽에서 담은 안산 전경]

 

미세먼지가 자욱하게 낀 날이어서 안산의 모습이 뿌옇게 보였다.

 

[호간공 묘 뒤쪽 묘 전경]

 

이손선생 묘역 뒤편으로 4기의 묘가 있다.
바로 뒤편 묘역은 이손의 와증조부인 양성이씨
李澣(이한, 생몰년 미상)의 묘소이다.

 

[兵曹參判(병조참판) 李澣(이한, 생몰년 미상)의 묘]

 

兵曹參判(병조참판)을 지낸 李澣(이한)은 李蓀(이손)의
외증조부이자 한원군 이철수의 妻(처) 祖父(조부)이다.
李澣(이한)의 장남 이맹상의 딸이 한원군 이수철와 결혼하여
이손과 이소를 낳았다.

 

[墓碑(묘비)]

 

兵曹參判陽城李公澣之墓(병조참판양성이공한지묘)
貞夫人漢陽韓氏祔左(정부인한양한씨부좌)

 

[좌우 文人石(문인석)]

[兵曹參判(병조참판) 李澣(이한, 생몰년 미상)의 묘]

 

원래 이곳에는 陽城李氏(양성이씨) 李澣(이한)선생의 墓(묘)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 자리가 風水家(풍수가)들 사이에 명당이란
소식이 널리퍼졌다.


그래서인지 외증손자인 廣州李氏(광주이씨) 李蓀(이손)의
墓(묘)가 李澣(이한) 선생의 墓(묘) 아래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 후 1989년에 자손들이 李養中(이양중) 선생의 墓(묘)와
그 손자 이수철 선생의 묘를 이곳으로 移葬(이장) 하였다 전한다.

 

[이한 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이한 묘 뒤쪽 이수언 묘 와 뒤쪽 묘 전경]

[한산군 이손의 長男(장남) 李粹彦(이수언) 묘]

[墓碑(묘비)]

[神道碑(신도비) 앞 뒤면 전경]

[이수언 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이수언 묘쪽에서 담은 뒤편 이수철 묘 전경]

[漢原君(한원군) 李守哲(이수철) 묘 전경]

[漢原君(한원군) 李守哲(이수철) 묘]

 

石灘公 諱 養中(석탄공 휘 양중)의 孫子(손자)로, 자 成夫(성부),
世宗朝(세종조) 原從功臣(원종공신)으로 牧使(목사)에 올라
平安道 節度副使(평안도 절도부사)에 이르셨다가 廣州(광주)로
물러나와 산수와 더불어 즐기며 지내셨다.


후에 장자 蓀(손)이 귀히되어 左贊成(좌찬성)에
증직되고 漢原君(한원군)으로 封(봉)해졌다.

 

[墓碑(묘비) 앞 뒤면]

[좌우 文人石(문인석)]

[石灘公(석탄공) 李養中(이양중) 묘 전경]

 

李養中(이양중, 생몰연대 미상)
본관 廣州(광주) 자 士개(사개) 호 石灘(석탄)
일찌기 태종. 야은. 상촌. 운곡등과 사귀며 참된 선비의 자질을 길렀다.


高麗朝(고려조) 말에 문과급제 하여 형조참의에 이르렀고
이태조가 혁명하자 항절 하여 광주 남한산 아래에 은거 하였고
지금의 고덕동에 살았다 한다.


훗날 뜻있는 지사들과 함께 조선조에 벼슬 하지 아니하고
절개를 지키니 세상은 杜門洞七十二賢(두문동칠십이 현)이라 불러온다.

 

[石灘公(석탄공) 李養中(이양중) 묘]

 

태종이 즉위한후 옛 친구로서 대하며 出仕(출사) 하기를
권하여 漢城府允(한성부윤)을 제수 하였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


太宗(태종)이 광주로 石灘(석탄)을 찾아가니 공은
야인의 복장으로 다만 거문고를 들고 와서 왕을 배알 하고
술과 생선안주를 함께 드렸으나 그 절개만큼은 추호도 굽힘이 없었다.

 

[묘비 앞 뒤 면]

[좌우 文人石(문인석)]

[석탄공 이양중 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석탄공 이양중 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답사를 마치고 내려오며 묘역과 안산 전경]

[高德齋(고덕재) 현판]

[高德齋(고덕재) 전경]

[高德齋(고덕재) 앞 좌우 해태상]

 

묘역 초입에는 이양중 선생의 사당인 高德齋(고덕재)가 있고,
우측 안쪽 묘역 아랫쪽에는 이손 선생의 사당인 한산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묘역으로 오르느라 담지 못하고 지나친 德齋(고덕재) 이곳 역시 문이 닫혀 있어서
들어가지 못하고 담너머로 담을까하였지만, 그것도 이중 삼중으로 쌓은 높은 담 때문에
담을 수 없었기에 전체의 전경과 앞쪽 좌우 해태상만 담고 돌아섰습니다.


胡簡公(호간공) 李蓀(이손) 묘역 및 신도비 답사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