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景哀王陵(경애왕릉)

2019. 2. 18. 05:41뿌리를 찾아서/왕릉 답사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산 73-1

 

[삼릉과 경애왕릉 사이의 작은 돌다리]

 

삼릉에서 오른쪽 숲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작은 돌다리가 있다
이 돌다리 앞쪽 숲 사이로 경애왕릉이 보인다.

 

[돌다리 쪽에서 담은 경애왕릉 옆 전경]

 

경애왕은 신덕왕의 아들로 성은 박씨이고 이름은 위응
형인 경명왕이 죽자 왕위를 이어 받게 되었다.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는 이미 신랑의 국운이 거의 기울어진 때였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후백제의 수차례 공격을 받았던 그가 고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후백제를 견제하려 하였다.

 

[景哀王陵(경애왕릉) 전경]

 

고려 왕건이 군사를 일으켜 후백제를 공격하게 되자
신라도 이에 군사를 원조하였다 그러나 후백제의 반격으로 왕건이
수세에 몰리게 되었고 이러한 틈을 타 고려의 원병이 도착하기도 전에
신라의 수도인 금성을 기습당하였다.

 

[景哀王陵(경애왕릉)과 상석]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당시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연회를 벌이던 중이었고
후백제 견훤군이 쳐들어오는지도 모른채 습격을 받아 포로가 되어 강요에 의한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안내판 과 경애왕릉 전경]

[경주 경애왕릉 안내판 글 내용]

[정면에서 담은 경애왕릉 전경]

 

그러나 이는 왜곡된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한다.
경애왕은 이미 견훤이 쳐들어오기 두 달 전에 왕건에게 급히 원군을 요청했던
기록이 있으며 한 겨울인 음력 11월에 노천에서 여흥을 즐겼을리도 만무하기 때문이라 한다.

 

[경애왕릉과 묘비 전경]

 

포석정은 신라 왕실이 제례를 거행하던 신성한 장소였으며
견훤의 침입이 눈 앞에 닥치자 경애왕은 마지막으로 이곳에 들어와
왕실을 안녕을 빌기 위해 제례를 지내려 했던게 아니었들까 하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떻게 보면 경애왕은 불운한 시기에 태어나 왕조를 물러 받은 비운의 왕이 아니었을까

 

[경애왕릉 묘비 전경]

 

1971년 4월 28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22호로 지정되었다.

 

[景哀王(경애왕) 墓碑(묘비)]

[우측에서 담은 경애왕릉 전경]

 

이후 견훤에 의하여 왕위를 잇게 된 김부는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해목령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해목령은 경애왕릉에서 떨어져 있어서 맞지 않으며,
해목령 가까이에 있는 지금의 일성왕릉을 경애왕릉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뒤쪽에서 담은 경애왕릉]

 

형태는 외형이 일반민묘와 같은 圓形封土墳(원형봉토분)으로 별다른 특징은 없다.

 

[뒤쪽에서 담은 경애왕릉 안산 전경]

 

지름 13.8m, 높이 4.2m로 일반민묘보다는 규모가 크나,
신라왕릉으로는 빈약한 편이며 발굴된 적은 없다.
능 앞으로 마련된 상석은 비교적 근년에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하네요.

 

[다시 담아 본 돌다리]

 

시간이 여유롭다면 나정 - 포석정 - 지마왕릉 - 삼릉 코스를
솔향을 맡으며 산책하듯 신라의 옛 정취를 느껴보는것도 좋을듯 하다

 

비운의 왕 景哀王陵(경애왕릉) 소개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