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 111주년 기념 전시회

2018. 3. 1. 05:59뿌리를 찾아서/忠. 孝. 烈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서구 성당동 187

 

[대구문화예술회관 제4전시실 입구 전경]

[국채보상운동 111주년 기념 전시회 안내책자 앞면]

 

아래는 안내책자 속 설명을 순서대로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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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 111주년 기념 전시회 안내책자 뒷면]

 

오랫만에 지인의 점심을 함께 하자는 전화를 받고,
옆지기의 허락을 받고는 약속장소로... 점심후 한참을 얘기나누다가
조금 떨어져 있는 두류문화예술회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요즘 갤러리 탐방에 푹 빠져 있는 나.
마침 국채보상운동 111주년 기념 전시회를 하고 있었다.
오늘이 3.1절 99주년 기념일이라 뜻깊은 전시회 소개를 드리고 싶어 올립니다.

 

 

 

[전시장 좌측 내부 전경]

 

 

 

 

 

 

 

 

 

 

[전시장 내부 전경]

 

 

 

 

 

 

 

 

 

 

 

 

 

 

[전시된 자료]

[조회정. 김병홍 회문(1907. 2.11)]

[취지서 (연도미상)]

[창원 단원회 광고(1907. 1.29)]

[애국상채문 통문(1907. 음 3.2)]

 

1904년, 일제는 우리나라의 경제를 파탄에 빠뜨려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해 한국 정부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게 하였다.

통감부는 이 차관을 우리나라 국민의 저항을 억압하기 위해
경찰 기구를 확장하는 등에 사용했고, 1907년, 한국 정부가
짊어진 외채는 총 1,300만 원이 되었다.

이는 당시 1년 예산에 버금가는 금액이었고,
현재의 물가로 약 3,300억 원에 달하는 거액이었습니다.

당시 한국 정부로서는 이러한 거액의
외채 상환은 불가능했고, 경제는 파탄에 이르게 됩니다.

이에 1907년 2월, 대구에서 국채를 상환하여
국권을 회복하자는 주권 수호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국채보상운동입니다.

서상돈, 김광제 선생 등이 중심이 되어 의연금을 모아
일본에 진 빚을 갚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곧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전시실 우측 내부 전경]

 

그러나 1907년 말부터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일제는 발행인인 베델 선생의 추방 공작을 전개하였고,
1908년에는 대한매일신보의 총무인 양기탁 선생에게 국채 보상금을
횡령했다는 혐의를 씌워 구속하는 등 지속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을 방해했습니다.

일제의 방해 공작과 탄압이 가속되자 국채보상운동은
결국 3개월이라는 단기간 동안 전개되고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비록 일제의 방해로 막을 내렸지만, 국채보상운동은 우리 민족
자주독립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연 역사적인 운동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