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士珍義兵將遺蹟(장사진의병장유적)

2017. 12. 6. 06:03뿌리를 찾아서/忠. 孝. 烈

 

소재지 : 경상북도 군위군 효령면 병수리, 오천리

경상북도 기념물 제122호

 

[증수군절도사 의병장장사진유허비 전경]

 

遺(비)에는 '贈水軍節度使 義兵將張士珍遺墟碑'라 새겨져 있다.

뒤쪽에 보이는 건물이 의병장 장사진을 모시는 忠烈祠(충렬사)이다.

 

[贈水軍節度使 義兵將張士珍遺墟碑(증수군절도사의병장장사진유허비)]

[忠烈祠(충렬사) 오르는 돌계단]

 

張士珍(장사진) 의병장은 어려서부터 호협심이 대단하여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여 남이 당하는 것을 보고는 앞뒤를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손해를 보는 일이 가끔 있었으나 개의하지 않았다.
이웃사람들은 義俠人(의협인)이라고 불렀다 합니다.

 

[忠烈祠(충렬사) 오르는 돌계단 2]

 

재주도 있어 군위향교의 校生(교생)의 신분으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승승장구하는 왜세를 당하지 못하여 어러울 때

분연히 일어나 적과 맞싸웠다 한다.

 

[仰止門(앙지문) 전경]

[仰止門(앙지문) 현판]

[仰止門(앙지문)]

 

삼문이 굳게 닫혀 있어서 들여다 볼 틈도 없네요...ㅠ.ㅠ

 

[仰止門(앙지문)에서 담은 우측 전경]

[안내판 글 내용]

[梧山忠烈祠(오산충렬사) 현판]

[梧山忠烈祠(오산충렬사) 전경]

 

의병을 인솔하여 고을의 주위를 돌면서 우선 고을만이라도

지키기로 하고 적을 만나는 대로 격살하여 막대한 전과를 올렸다.

 

왜적들도 장사진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군위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통과할 일이 있어도 길을 우회하여 다녔다 한다.

 

[충렬사 뒤쪽 건물 협문]

 

忠烈祠(충렬사) 출입문이 닫혀 있어서 들어가 볼 수 없었다.

어딘가 다른쪽의 출입구가 있나하고 둘러보았지만... 역시...

 

[담너머에서 담은 梧山忠烈祠(오산충렬사) 옆 전경]

 

1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군위. 仁同(인동) 지역의 왜적을 공격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으나 1592년 9월 왜적과 분전하다가 적병이 휘두르는 칼에

한쪽 팔이 잘렸으나 굴하지 아니하고 외팔로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전사하였다.
뒤에 그 공으로 水軍節度使(수군절도사)에 追贈(추증)되었다.

 

[담너머로 담은 梧山忠烈祠(오산충렬사)]

 

당시의 기본사료인 '草本懲毖錄(초본징비록)'과

'宣祖修正實錄(선조수정실록)'에는 張士珍(장사진)을 郭再祐(곽재우). 金沔(김면).

鄭仁弘(정인홍). 金垓(김해) 등과 함께 경상도의 대표적 의병장으로 평가하였다.

 

[梧山忠烈祠(오산충렬사) 전경]

 

넓게해서 담아 보았지만, 볼록렌즈로 담은 듯 볼록하게 곡선으로 보이네요.

 

사당뒤쪽으로 '수군절도사 장사진 제단비와 묘소'가 있다는데...

문이 닫혀 있으니 어찌해 볼 수가 없네요.

 

[忠烈祠(충렬사) 다녀오며 담은 仰止門(앙지문) 전경]

 

忠烈祠(충렬사)를 언제 세웠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고종 5년(1868)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던 것을 1889년

忠烈祠(충렬사)터 뒤편에 제단을 만들고 초가삼간을 지었다.

 

[사진에 담긴 내 그림자]

 

군위군 효령면 오천리에는 장사진 장군이 조성했다는 將軍泉(장군천)이 흐르고 있다.

 

오천리 인근의 주민들은 장군의 넋을 기리기 위해

사당 忠烈祠(충렬사)를 세우고 매년 한식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