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국채보상운동 발상지 광문사터

2017. 3. 7. 06:01뿌리를 찾아서/忠. 孝. 烈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로 22길

 

[국채보상운동 발상지 수창초등학교 후문 전경]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국채를
국민들의 모금으로 갚기 위하여 전개된 국권회복운동.

 

[경제국권수호의 문을 열다]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당시부터 우리나라에 대해
적극적으로 借款供與(차관공여)를 제기하여 두 차례에 걸쳐
각 30만 원과 3백만 원의 차관을 성립시켰다.

일본의 차관 공세는 1904년 제1차 한일협약 이후 더욱 노골화되었다.

담아온 자료들을 올립니다.
찬찬히 둘러보셔요.

 

 

 

각지에서 취지를 같이하는 28개 여성단체와
17개 준여성단체가 속출하여 의연금을 모집하였다.


특히 기생 앵무의 1백원 의연은 당시 전국적인 화제가 되었는데,
'여자로서 감히 남자보다 한 푼이라도 더 낼 수 없으니 누구든지
몇 천 원을 출연하면 나도 따라하겠소'라고 하여 남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위 설명 글 중에서 한 부분 옮김)

 

 

[자료 및 기록 문서]

[안쪽에서 담은 경제국권수호의 문을 열다 벽화 전경]

[국채보상운동 발원지]

[국채보상운동 광문사 터 표석비]

[안내글 내용]

[국채보상운동 광문사 터 표석비 전경]

1907년 2월 중순대구의 廣文社(광문사)
사장 金光濟(김광제)와 부사장 徐相敦(서상돈)은
斷煙(단연)을 통하여 국채를 갚아 나가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하였다.

 

 

당시의 광문사는 지식인과 민족 자산가로 구성되어,
주로 실학자들의 저술을 편찬하고 신학문을 도입하여
민족의 자강 의식을 고취하고 있던 출판사였다.

"국채 1천 3백만 원은 바로 우리 대한제국의 존망에
직결되는 것으로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인데, 국고로는
해결할 도리가 없으므로 2천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국고를 갚아 국가의 위기를 구하자"고 발기 취지를 밝혔다.

 

 

 

 

 

 

 

[1882년도 태극기]

[1882년도 태극기와 자료 전경]

이 운동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많은 부녀 층이
참여하여 각종 패물을 義捐所(의연소)에 보내 온 점이다.

그리고 노동자, 인력거꾼, 기생, 백정 등
하층민들까지도 적극 참여하여 이 운동은 그야말로
범국민적 운동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국채보상운동은 처음부터 순수한 애국 충정에서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것으로서, 전국적인 통일된
지휘체계 하에서 진행된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일제의 방해, 탄압 책동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끝내 좌절되었던 것이다.

운동이 비록 좌절로 끝나긴 하였으나 국권 회복을
위한 투쟁의 하나로서 그 역사적 의의는 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