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사충과 뽕나무 사랑 이야기

2017. 1. 5. 06:13추천합니다/관광지와 휴게실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의 지리전략가인
두사충(杜師忠 또는 杜思忠) 장군이 귀화하여
인근 경상감영공원 터에 살다가 경상감영이 대구로 옮겨오자
그 자리를 내어주고 정착한 곳이 지금의 계산성당 인근 지역(계산동)이다.


두사충은 그 일족과 함께 길쌈을 하여 먹고살고자
계산동 일대에 뽕나무를 많이 심어 뽕나무 밭을 일궜다.


그 후 두사충은 최정산(最頂山·현 대덕산) 기슭으로
옮겨가고 민가가 들어섬에 따라 뽕나무는 대부분 사라졌으나
'뽕나무 골목'이란 이름으로 두사충의 전설은 아직까지 전해온다.

 

 

 

늘그막에 상사병이 들다시피 해 날마다 뽕나무에 올라
애태우는 아버지를 지켜보던 아들은 마침내 큰 결심을 하고
이웃집을 방문하여 미모의 아낙네를 만나보았다.

 

 

그 아낙네는 청상에 홑몸이 되어 수절하고 있던
과부로 두사충을 몰래 흠모하고 있던 터라 쉽게 중매가 되어
두사충의 사랑이 결실을 맺게 되었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뽕나무가 거의
사라졌지 그 때의 뽕나무밭 사랑을 전해주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어 두 차례에 걸친
전란을 마무리하였으나 그 자신은 적의 흉탄에 장렬히 산화하였다.


이를 지켜 본 두사충은 크게 감동하여 조선에
귀화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이순신 장군의 음택을 잡아주었다.

 

 

이순신 장군과 두사충의 우정은 그 자손들에게 계속 이어져
이순신의 7대손인 삼도수군통제사 이인수는 대구 만촌동 소재
두사충의 묘 앞에 비석을 세우고 이순신이 두사충에게 써준 詩(시)


奉呈杜僕射(봉정두복야)를 찬하였다.

 

 

[뽕나무 골목과 두사충 사랑이야기]


두사충이 귀화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그가 원하는 곳에 식읍을 주어 살게 해 주었다.
두사충은 그동안 조선 팔도를 다니면서 봐 두었던 곳,
현 경상감영공원 자리를 달라고 요청하여 조선 조정의 승낙을 받았다.


그 자리는 하루에 천량이 나오는 길지였다.

 

 

 

경상감영공원 자리는 그 후 대구의 중심이 되었고
인근 향촌동은 한동안 대구의 중심상업지로 불야성을 이루었는데
두사충의 말대로 하루에 천량이 나오는 땅이 되었다.


두사충이 경상감영공원 자리에서 2년 남짓 살고 있던
선조 34년(1601) 당시 상주에 있던 경상감영이 대구로 이전함에 따라
두사충은 대구의 중심지 격이었던 자신의 땅을 흔쾌히 경상감영 터로 내어놓았다.


아무리 명당이라 하더라도 나라가 먼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조선 조정은 이러한 두사충의 충성스러운 마음을 갸륵히 여겨 당초 면적의
갑절에 해당하는 땅을 대토해 주어 그 가솔을 이끌고 편안히 살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