休休堂(휴휴당) 不祧廟(부조묘)

2016. 7. 4. 06:12문화산책/여러 종류의 민속자료

 

소재지 : 경상북도 구미시 도개면 도개다곡길 378-18
문화재자료 제527호

 

[휴휴당 부조묘 전경]

본래 4대가 넘는 조상의 신주는 사당에서 꺼내 묻어야 하지만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위는 왕의 허락으로 옮기지 않아도 되는
'不遷之位(불천지위)'가 된다.

불천지위가 된 대상은 사당에 계속 두면서 기제사를 지낼 수 있다.


[부조묘비와 뒷쪽 사당 전경]

'不祧廟(부조묘)'는 중국의 한나라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 부조묘가 등장한 것은 고려 중엽 이후 사당을 짓게 되면서부터이다.

불천위가 된 신주는 처음에 묘 밑에 설치할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종가 근처에 사당을 지어둘 수 있게 됨으로써 부조묘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부조묘는 본래 국가의 공인절차를 받아야 하나
후대로 오면서 지방 유림의 공의에 의해서도 정해졌다.


[좌의정휴휴당부조묘비

[부조묘 성역화 기념비]

[春秋門(춘추문) 현판]

[기념비와 사당 삼문(춘추문) 전경]

조선시대에 명문가가 될 수 있는 자격요건의 하나는 '不祧廟(부조묘)'였다. 
부조묘는 不遷位(불천위) 제사의 대상이 되는 신주를 모신 사당을 일컫는다.

不遷位(불천위)란 나라에 큰 공훈이 있다고 국가가 인정한
인물의 神位(신위)로, 4대奉祀(봉사)가 지나도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에서 영구히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를 가리키는 말이며
'不遷位(불천위)'를 모시는 사당을 '不祧廟(부조묘)'라 한다.

불천위를 모시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었다.
주변사람들로부터 그 집안이 명문가로 대접을 받는 조건이기도 하였다.
불천위가 있어야 '宗家(종가)'도 될 수 있었다.

 

[안내판 글 내용]

[사당 전경]

조선 성종조 좌의정을 지낸 洪應(홍응, 1428-1492)
자 應之(응지) 호 休休堂(휴휴당) 본관 南陽(남양)
아버지는 漢城府尹(한성부윤)을 지낸 洪深(홍심)이다.


洪應(홍응)을 기리기 위한 불천위 사당으로 唐陽里(당양리)에
창건되었던 것을 1630년경 현재의 위치로 옮겨 중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후손들에 의해 수차례의 중수를 거쳐 1928년 중건으로 건축학적으로
크게 주목되는 점은 없다지만, 문화재로서의 자료는 충분하다 한다.


[不祧廟(부조묘) 현판]

[좌측에서 담은 不祧廟(부조묘)]

조선 전기의 재상인 홍응은 어려서 노사신과 함께 공부하였고,
문종 1년(1451) 생원시에서 2등으로 합격하고, 같은 해의 증광시에서
을과 1인(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우측에서 담은 不祧廟(부조묘)]

이어 사간원 우정언. 지제교에 임명되었고,
춘추관기사관. 집현전 수찬을 거쳐 사가독서를 허락받았으며,
이후 세조로부터 우대를 받으면서 승정원 동부승지. 우승지.
좌승지. 도승지.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부조묘에서 담은 사당 솟을삼문 전경]

세조가 궁중에 설치한 내경청에서 사경하기도 하였으며,
세조 9년(1463) '明皇戒鑑(명황계감)'을 언해하였고,
'經國大典(경국대전)'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부조묘비 옆 담밖에 핀 무궁화]

[慕遠堂(모원당) 현판]

[慕遠堂(모원당)]

1479년(성종 10) 가을에 우의정이 되었고,
다음해에 좌의정에 올라 역사적으로 주목받는 인물이다.

현재의 시점에서도 해마다 4월 4일 불천위의 제례가
행하여져 이 지역의 무형 문화의 일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休休堂(휴휴당) 不祧廟(부조묘) 전경]

이곳 不祧廟(부조묘)는 산기슭의 경사지에
토석담장을 둘러 일곽을 형성하고 있으며, 전면에는
좌의정 휴휴당 부조묘비를 두고 좌측에는 祭廳(제청)인 慕遠堂(모원당)이,
祠堂(사당)은 이 공간을 지나 높은 단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불천위를 모신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므로
불천위제사는 이러한 권위를 드러내는 것으로
시제사보다 휠씬 많은 음식을 차려 제사를 지낸다.

대표적으로 은혜리의 퇴계 이황 종가, 하회마을 겸암 류운룡 종가
서애 류성룡 종가, 봉화 닭실마을 충재 권벌 종가, 의성의 학봉 김성일 종가
'不遷位祭祀(불천위불제사)'가 많이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