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2. 23. 05:44ㆍ문화산책/정자와 누각
소재지 :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사곡리 1326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5호
[隅谷亭(우곡정) 전경]
隅谷亭(우곡정)은 고려말 대사헌을 지냈던 우곡 정온이
조선 태조의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조용히
지내고자 태조 2년(1393)에 지은 정자이다.
[우곡정 우측편 전경]
우곡정에 들렸는데, 우측 조금 떨어진 곳에
비와 열려각이나 효자각 그 옆으로 커다란 시비가
보여 궁금하여 우선 이곳부터 들려보기로 하였다.
[굼실촌 향가 碑(비)]
[굼실촌 향가 碑文(비문)]
[孝烈閣(효열각) 현판]
[孝烈閣(효열각) 전경]
부부가 효자 열녀 부모님을 정성을 다해 모시고
열일곱 어린 나이에 어머님 병환중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기력을돌아오게 하였으며, 돌아가신 후에는 삼년상을 정성을 다하고,
남편 병중 정성을 다해 살리려 애쓰셨으나 돌아가심에 상중 모든
조처를 다하시고 스스로 자결하여 부부종사하셨다 합니다.
[孝烈閣(효열각) 碑文(비문)]
효자 통정대부예조참의진양정규노지려
고종 32년 열부 증 숙부인 성산이씨 지려 라 비문에 새겨져 있다.
[隅亭感古(우정감고) 碑(비) 전경]
[隅亭感古(우정감고) / 효봉 정헌주]
抉經當日有誰同(결경당일유수동) / 강상을 붙들던 그 날 그 누구 함께하는 이 있었던가?
明㡬先見危難際(명기선견위난제) / 사리판단이 밝아 국가의 위기가 닥칠 때를 먼저 내다 보았고,
苦節孔知板蕩中(고절공지판탕중) / 굳센 절개로 나라의 정사가 어지러움 속에 있음을 능히 알았도다.
園裏松回鍼目翠(원리송회침목취) / 동산의 솔잎은 예리한 바늘되어 눈동자를 찔렀고
塘前薇輿矢心紅(당전송회침목취) / 연못 앞 배룡나무의 붉은 마음은 화살을 맞았도다.
登斯孝感油雲記(등사효감유운기) / 여기 오르니 효행의 감동이 구름처럼 피어올라
愧我變誠繼경功(괴아변성계경공) / 그 공을 계승함에 내 성의 없음을 부끄러워 하노라
[우정감고 현대어 풀이]
[茅山齋(모산재) 솟을삼문 전경]
굼실촌 향가 碑(비)와 孝烈閣(효열각), 隅亭感古(우정감고) 詩碑(시비)
까지 둘러보았으니 이젠 원래의 목적지인 우곡정을 둘러보려 하였는데,
우곡정가 나란히 재실인 모산재가 자리하고 있기에 여기도 소개합니다.
[茅山齋(모산재) 현판]
[茅山齋(모산재)]
[隅谷亭(우곡정) 전경]
[우곡정 안내판 글 내용]
[우곡정 앞쪽 蓮塘(연당)]
대문 밖 앞뜰에는 낚시하던 연못을 예전의 모습대로 보존하고 있다.
[蓮塘(연당) 속 돌거북 / 애니메이션 편집]
蓮塘(연당) 중앙에는 돌로쌓은 위에는 머리가 세개가 달린
거북이 조각 작품을 만들어 놓았기에 신기해서 담아온 사진으로
포토스케이프로 애니매니션 편집해 보았습니다.
[節義門(절의문) 현판]
[우곡정 솟을 삼문 節義門(절의문) 전경]
鄭溫(정온, 1324~1402)
진산부원군 鄭櫶(정헌)의 손자로 고려의 문신이다.
본관 晉州(진주) 호 偶谷(우곡), 자 子玉(자옥)
鄭碩(정석)의 아들로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고려 말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다.
태조의 易姓革命(역성혁명)에 반대하여 杜門洞(두문동)과
靑鶴洞(청학동)에 은거 수양하다가 낙향하여 태조 2년(1393)
이곳에 정자를 짓고 隅谷亭(우곡정)이라 불렀다.
[節義門(절의문) 좌측 옆 우곡 선생 신도비]
고려대사헌 우곡정선생 신도비
거북 모양 비석 받침돌과 용을 새긴 비석 머릿돌이
비신과 더불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신도비 머릿돌]
[고려대사헌우곡 정선생 신도비]
[隅谷亭(우곡정) 현판]
[隅谷亭(우곡정)]
정온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不事二君(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켜 은둔생활을 하였다
태조가 사위인 이제를 보내 모셔가려고 하자 차마 왕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 靑盲(청맹: 겉은 멀쩡하나 실제는 눈이 안 보임)을
앓는다는 핑계대고 벼슬을 버리고 두문동으로 들어갔다가 말년에는
진주 사봉면 사곡리에 우곡정(隅谷亭)을 짓고 은거하였다.
[우곡정 앞쪽 좌측 옆 우곡정선생 유허비 전경]
이성계의 사위 이제는 그 진위를 시험하기 위해 정자앞에
있던 푸른 소나무의 솔잎을 한줌 뜯어 정온의 눈을 찔러 보았다.
그러나 눈동자는 일체 움직이지 않고 피만
낭자한채 스스로 시를 지어 자신의 마음을 나타냈다.
進鳳山前戴笠人(진봉산전대립인) / 진봉산 아래 삿갓 쓴 사람은
人蔘花下舊王民(인삼화하구왕민) / 인삼 꽃밭 옛 나라 백성이라요
托盲去後今來見(탁맹거후금래견) / 장님을 핑계하고 돌아 와 이제 보니
有目無言不死身(유목무언불사신) / 눈은 있어도 말 못하는 죽지 않는 몸인데
[우곡정선생 유허비]
[우곡정선생유허비]
우곡 정선생 유허비가 2기가 세워져 있었다.
오래된 옛비가 글씨가 흐릿하여 다시 새 비로 세운것 같은데...
자세한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우곡정 내부 편액]
이제와 함께 왔던 사람들은 마을을 한 번 둘러본 후
'士氣滿谷(사기만곡)'이란 말을 남기고 그냥 돌아갔다 한다.
이는 '선비 기운이 가득한 골짜기'란 뜻으로
이로부터 '士谷(사곡)'이란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
[우곡정 내부 편액 2]
이 이야기를 들은 태조 이성계는 다시는 정온선생을 찾지 않았으며
정온선생은 말년에 이곳에서 조용하게 세상을 보낼 수 있었다 전한다.
[이제 詩]
이제는 정온의 높은 충절을 기려 다음과 같이 답시했다.
漆身(칠신)으로 끼친 의리 청맹을 청탁하고
취하고 버리는 중에 그 의절은 서릿발 같아
솔잎조차 어찌 굳은 절개를 꺾을 수 있으랴
그 이름 천년토록 햇빛같이 빛나리라
[좌측에서 담은 우곡정 과 재실 모산재 전경]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八(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헌종 15년(1849)에 중수하였으며 1976년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우곡정에서 담은 앞쪽 솟을 삼문 節義門(절의문) 전경]
부인과 자식 등 가족들에게 조차 얼마나 철저히
청맹을 지켰던가를 알 수 있는 이야기 하나가 남아있다.
어느 날 주위에 아무 사람도 없이 혼자 마루에 앉아 있을 때였다.
마치 병아리들이 몰려와 마당에 있는 곡식을 쪼아 먹는 것을 본 정온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주주"하며 쫓아 버렸다.
멀리서 이를 본 부인이 시험삼아
"눈에 보이는 것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정온은
"소리만 들었지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고 속여 대답했다.
[신도비와 谷亭(우곡정) 솟을삼문 절의문 전경]
또한 후손들에게 조선왕조에서는 절대로 출사하여 벼슬을
하지 말도록 자손들을 훈계하기 위해 남긴 '月牙山記(월아산기)'는
아직도 신비한 기록으로 후손들에 의해 보관되고 있다.
포은 정몽주의 죽음과 야은 길재의 은둔과 우곡 정온의 청맹을
중국 은나라의 三仁(삼인)에 비견하고 있다.
숙종 20년(1694) 지방유림의 발의로 鼎崗書院(정강서원)에
배향되었으나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그 후 장성 景賢詞(경현사)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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