洛峰書院(낙봉 서원)

2018. 10. 30. 06:00문화산책/향교와 서원

 

 

소재지 : 경상북도 구미시 낙성리 747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22호

 

[洛峰書院(낙봉서원) 입구쪽에서 담은 전경]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22호로 등록되어있는
'洛峰書院(낙봉 서원)'은 조선시대인 1646년 지어졌다.

 

[서원 담 밖에서 담은 洛峰書院(낙봉서원)]

 

조선후기의 학자 이중환 선생은 자신의 저서 택리지에서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
고 하였다.

예부터 많은 인재를 배출한 만큼 지역 곳곳에 이들을 모신 서원을 찾아볼 수 있다.

 

[洛峰書院(낙봉서원) 외삼문 전경]

 

1787년(정조 11) '洛峰(낙봉)'이라는 현판을 받고,
賜額書院(사액서원) 승격되어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을 담당하였으나,
서원철폐령에 따라 고종 8년(1817)에 철폐되었다.

1931년 지방 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면에서 담은 洛峰書院(낙봉서원) 외삼문]

 

이 서원은 인조 24년(1646)에 건립되어 金叔滋(김숙자), 金就成(김취성),
朴雲(박운), 金就文(김취문), 高應陟(고응척) 등 5인을 모시고 추모하는 곳이다.

 

[외삼문쪽에서 담은 낙봉서원 전경]

 

金叔滋(김숙자)는 조선 전기 문신이며 학자로 길재의
가르침을 이어받고, 여러 벼슬을 거친 뒤 밀양으로 내려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金就成(김취성)은 朴英(박영)의 가르침을 받고 여러 번
참봉에 추대 되었으나,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朴雲(박운)은 원종의 아들로 중종 14년(1519)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그 후 高應陟(고응척)과 조선 명종(재위 1545~1567) 때 3대 청백리로
뽑혀 존경받던 金就文(김취문)을 추가로 모셔 모두 다섯 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洛峰書院(낙봉 서원) 현판]

[洛峰書院(낙봉 서원)]

[안내판 글 내용]

[안내판 영문 글 내용]

[洗心齋(세심재) 현판]

[洗心齋(세심재)]

 

동. 서재는 구조가 동일한 대칭적 구성의 건물로
각기 정면 3칸, 측면 1칸 크기의 三樑架(삼량가) 장혀수장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이루어져 있다.

 

[洗心齋(세심재) 내부]

[正敎堂(정교당) 현판]

[正敎堂(정교당)]

[正敎堂(정교당) 내부]

[洛峰書院(낙봉 서원)]

 

강당은 중앙 2칸에 대청이 자리 잡고 그 좌우에 온돌방이 놓여 있다.
전면에는 툇마루를 두고 우측면에는 쪽마루를 두었으며, 왼쪽 방 뒷벽에는
뜬벽장을 두었다.

대청과 양쪽 방 사이에는 정자살 불발기를 넣은 맹장지 4분합
들문을 달아 필요할 때 공간을 확장하거나 구획할 수 있게 했다.

 

[洛峰書院(낙봉 서원) 여러 현판 등]

 

1933년에 강당을, 1943년에 외삼문을,
1977년에 사당을, 1989년에 동재를, 1990년 서재를
다시 지어 복원하였다.

 

[居敬齋(거경재) 현판]

[明誠齋(명성재) 현판]

[강당 안쪽 集義堂(집의당) 현판]

 

강당인 集義堂(집의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토론장소로 사용된다.

 

[낙동서원 강당 집의당에서 담은 동서재와 외삼문 전경]

 

조선시대 서원의 역할은 선현에 대한 제사,
후학에 대한 교육, 향촌사회의 교화 등으로 찾아볼 수 있다.

현재 낙봉서원에서 교육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나
매년 3월 두번째 丁日(정일)에 향사를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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