七松亭(칠송정)

2018. 6. 14. 05:52문화산책/정자와 누각

 

소재지 :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

 

[고봉 학술원 표석비]

 

월봉 서원을 찾아가느라 그냥 지나친 곳을 서원을 다녀오며
내려오는 길에 고봉 학술원 표석비를 보고 잠시 주차를 해 놓고는
학술원에 들렸으나, 학술원 출입문은 닫혀 있었다. 

 

[고봉 학술원 쪽에서 담은 七松亭(칠송정) 전경]

 

길 위쪽을 보니 수풀 사이로 정자가 보여 걸음을 빨리했다.

 

[七松亭(칠송정) 전경]

 

칠송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고봉 기대승의 장남 함재(기호증 선생) 공이 고봉 묘소 아래
시묘하든 곳으로, 후일 정자를 세워(1587년) 아침저녁으로 묘소에
참배하여 부모에 효도하지 못한 후회의 마음을 달랬다 한다.

 

[七松亭(칠송정) 현판]

 

현판 글씨는 한말의 거유 石村(석촌) 尹用求(윤용구) 공의 글씨라 한다.

 

[七松亭(칠송정)]

 

정자 주변에 손수 일곱 주의 소나무를 뜰 앞에
심어 정자의 이름을 '七松亭(칠송정)'이라 하였다.

 

[七松亭記(칠송정기)]

 

정자명은 의병으로 참여했던 함재 선생의 활동에 감탄한 선조 임금이
'천리길을 멀다 않고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추의가 참으로 가상하다'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함재 선생이 이곳에 일곱 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사계절 불변의 지조를 지닌 소나무의 절개를 본받았다는 뜻으로
七松亭(칠송정)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어떤 사연이었던 현재는 일곱 그루의 소나무는 남아 있지 않다.

 

[칠송정 옆쪽 고봉 학술원 담과 길]

 

이곳을 통하여 아버지의 묘소를 다녔는지, 가보고 싶었지만,
아래에서 기다릴 남편 생각에 안쪽으로 조금 더 오르다가 내려왔다.

 

[윗길 쪽에서 담은 七松亭(칠송정) 전경]

 

함재는 부친의 뜻을 좇아 벼슬길을 멀리하고
초야에 묻혀 학문을 연마하며 평생을 지낸 조선의 큰 선비였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군에 대적하였고
의곡 300석을 수집하여 의주의 行在所(행재소)로 수송하기도 하였다.

이에 선조 임금은 군기사 검정이라는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그는 완곡하게 사양하고 이곳에 내려와 부친의 학통을 이어받았다.

 

[七松亭(칠송정) 옆 전경]

 

칠송정 사방의 기둥에는 주련이 기둥마다 빼곡히 걸려 있었지만,
옆면의 주련만 담아 와서 아래에 편집하여 소개합니다.

 

[칠송정 기둥의 柱聯(주련) 편집]

 

주련은 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 붙이는 글씨로 기둥마다
시구를 연달아 걸었다는 뜻에서 이런 이름이 붙어졌다 합니다.

 

[내려오며 다시 담아 본 七松亭(칠송정)]

 

월봉서원을 둘러보고 다음의 일정을 향해서 출발
빠듯하게 잡힌 일정을 소화하려면 서둘려야 하기에 좀 더 살펴보지 못하고
돌아와서는 포스팅을 하며 알게 된 근처의 못 가본 곳에 대한 아쉬움이 늘 남게 된다.
그래도 이렇게 둘러보고 올 수 있었던 것에 대한 감사함의 마음으로 아쉬움을 달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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