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0. 31. 06:08ㆍ문화산책/고택과 문학관
소재지 :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
[缶林洪氏(부림홍씨) 宗宅(종택) 표지석]
[마을 돌담길]
이 마을은 돌담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때문에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뽑힐 정도로 운치가 있다.
이 돌담길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부림홍씨 종택이 있다.
한밤마을은 본래 深夜(심야) 또는 大夜(대야)라고 불리던 곳이다.
그러나 1390년경 홍씨 14대손 홍로가 大栗(대율)로 고쳐 불렀다.
[缶林洪氏宗宅(부림홍씨종택) 표지석]
[宗宅(종택) 삼문]
경북 군위 부계면에 자리한 전통마을로
950년께 남양 홍씨에서 갈려 나온 부림 홍씨의 시조
홍란이란 선비가 입향하면서 촌락을 형성했다.
그 무렵 의홍 예씨, 신천 강씨 등도
마을로 들어왔으나 모두 떠나고 현재는
여양 진씨, 전주 이씨, 예천 임씨, 영천 최씨, 고성 이씨 등이
부림 홍씨 일족과 어울려 살고 있다.
부림홍씨 종택이지만 남천댁보다는 위세가 떨어지는것 같다.
[宗宅(종택) 전경]
부림 홍씨 종택은 그리 역사가 길지 못 하다.
제2석굴암 부근에 종택이 있었는데, 화재로 소실돼
한밤마을로 옮겨와서 현재 10대째가 살고 있다.
[景節堂(경절당) 현판]
[景節堂(경절당) 사랑채 전경]
부림홍씨 종택은 경절당을 비롯하여 고려에 절의를 지킨
중시조 洪魯(홍로)선생의 영위를 모신 불천위 사당과 제전청이 있다.
[안채 중문]
부림홍씨의 중시조인 洪魯(홍로) 고려조 門下舍人(문하사인)벼슬을 지내다
두 임금을 섬기지않는다는 不事二君(불사이군)의 절의 정신으로 낙향한 곳이다.
[중문과 사랑채 전경]
洪魯(홍로, 1366∼1392) 본관 缶溪(부계). 자 得之(득지), 호 敬齋(경재).
조부 洪漣(홍련)으로 監務(감무)를 지냈으며, 부친 進士)인 洪敏求(홍민구)이다.
7세에 '孝經(효경)'을 능통하게 읽을 정도로 총명하고 부지런했다.
장성해서는 성리학과 고금의 가례 및 伊洛淵源錄(이락연원록) 등을 깊히 연구했다.
[사랑채 내부]
문장이 날로 늘어나자 牧隱(목은) 李穡(이색)은
"득지(得之)의 문장은 참으로 콩과 쌀같이 이로운 물건이다."
라고 칭찬했다.
科擧(과거)에는 뜻이 없었으나 주위의 권고로 22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25세인 1390년(공양왕 2)에 대과에 급제했다.
[사랑채 내부 2]
圃隱(포은)의 추천으로 翰林學士(한림학사)가 되고,
門下舍人(문하사인)으로 승진되었다.
당시 趙璞(조박)과 吳司忠(오사충)이
李穡(이색)과 曺敏修(조민수)를 죄로 다스려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자, 그들을 적극 변호하여 사태가 더 진행되지 못하게 하였다.
[종가 안채 전경]
나라가 점점 혼란해지자 병을 핑계로 사임하고 고향인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로 돌아와 부모 봉양과 독서와 사색으로 일관했다.
마을 이름은 원래 大食(대식) 혹은 大夜(대야)라 했으나,
敬齋(경재)가 大栗(대율)로 고치고 작은 서재를 지어 敬齋(경재)라 했다.
포은의 피살소식을 듣고 곡기를 끊어서 1392년
"신은 나라와 더불어 함께 망하겠습니다.
죽은 자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라는 말을 남기고
조선이 건국되는 시기에 삶을 마감하였다.
그의 나이 27세. 맑디맑은 정신의 소유자이다.
그의 무덤은 부계 동쪽 시현 간좌지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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