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4. 12. 06:03ㆍ문화산책/고택과 문학관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3동 219-3
대구광역시문화재자료 제23호
[드망즈홀(설립자관) 2관 현판]
[전시관 내부에서 담은 르망즈홀(설립자관) 2관 출입문쪽 전경]
[드망즈주교]
1911년 4월 8일 교황 비오 10세는 조선교구를 서울교구와
대구교구로 분리하였으며 드망즈 주교를 대구교구장으로 임명하였다.
[전시관 내부]
초대 교구장으로 부임한 드망즈주교는 숙소조차 없어
임시로 주교좌 성당 근처 한옥에서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학교 설립을 우선적으로 추진하였다.
[전시관 내부 2]
그만큼 성유스티노신학교 설립은 드망즈 주교의
가장 큰 업적이며 온 정성을 쏟은 사업이었다.
신학교야말로 교회의 모든 미래가 달려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전시관 내부 3]
그의 노력으로 한국 교회는 대구교구가 창설된 지
25년 만에 전주교구와 광주교구를 분리시킬 만큼 성장할 수 있었다.
[전시관 내부 4]
드망즈주교는 신부. 주교로서 40여 년 동안을 오직
한국교회의 발전을 위한 전교에 힘썼으며, 특히 그 중의
27년 동안은 대구교구장으로서 교구 발전에 뛰어난 공적을 남겼다.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원내 사제 휴양소에서 임종전의 드망즈 주교]
1914년에 57명으로 시작한 성유스티노신학교는 드망즈주교가
사망한 1938년 당시 118명이 수학하고 있을 정도로크게 성장하였다.
[전시실 내부 5]
드망즈홀은 성유스티노신학교 설립자관으로
드망즈주교의 생애와 관련된 문서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조선으로 떠나는 선교사들 빠리 외방선교회 사제들의 파견식(1865)]
[안내 글과 사진 설명 내용]
[전시관 내부 6]
[전시관 내부 7]
[祭衣(제의)]
[초대 교구장의 모관]
서정길 대주교와 이문희 대주교도 주교 성성식 때 이 관을 사용하였다.
모관[주교관] : 교황, 추기경, 대수도원장, 주교가 의식 때에
착용하는 모자 속에는 두꺼운 종이등을 넣었고 바깥에는 비단이나
린넨으로 된 두 장의 뾰족한 천으로 덮여 있다.
기도할 때에는 반드시 벗어야 한다.
[전시관 내부 8]
내일은 3관을 소개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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