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님시인의 목계장터 詩碑

2015. 11. 13. 06:33갤 러 리/詩와 詩碑(시비)

 

 

소재지 :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

 

 

[목계나루터]

 

목계가 나루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확인할 길이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충주목의 7진도 중 하나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나루의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음을 알수 있다.


충주 출신의 시인인 신경림이 옛날 목계장터를 노래한
시비가 있어 당시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다.


신경림은 1936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동국대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흔히 신경림을 농민의 아들, 이렇게 알려져 있지만 순수하게 그런 것은 아니다.
개울 하나 건너광산이 있는 집성촌에 딸린 마을에 살았다.


이것은 일반 농촌에서 자란 사람의 경험과는 다른 경험을 그에게 가지게 해주었다.
가령 주위의 문학하는 사람들은 어릴 때 대개가 등잔불에서 자랐는데
그는 전깃불 밑에서 자랐다고 한다.
충주에서 60리쯤 떨어진 곳으로 광산 때문에 전기가 일찍부터 들어왔기 때문이다.

 

 

[신경림 목계나루터 시비]

 

'낮달(1956)', '갈대(1956)'를 발표하여 시인으로 출발한

초기에는 자연을 소재로 하여 삶의 슬픔을 노래한 서정시를 썼다.


시골 농촌에 내려가 10여 년쯤 작품활동을 하지 않다가
1960년대 말에 다시 쓰기 시작하여,
그의 첫 시집은 1971년에야 나오게 되었다. 

 

신경림은 농촌의 현실을 소재로 농민의 소외된 삶을 그린
'농무(1971)'를 발표하면서 우리 문학사에 민중시의 깃발을 올리게 되었다.

신경림의 공인된 처녀작은 1956년 '문학예술'지에 추천된 갈대이다.
이 작품을 포함한 초기작 다섯 작품은 첫시집 '농무'에 수록되었기는
하였으나 65년 활동을 재개한 이후 발표된 시들의 강한 인상에 파묻혀
오랫동안 잊혀져왔다.


작가도 자기의 초기 문학세계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김현은 '내면화된 정적 울음'을 외연적으로 확대하는 길로 갈대를 말했다.

 

 

[목계나루터 / 신경림]

 

[아 사랑하는 牧溪(목계)]

 

[나루터]


지금으로부터 약 오백여 년 전 조선조 초기만 해도
중부 내륙지방의 인구가 소규모 분산 거주하고 있어서
그 당시는 自給自足 시대 였으며 또한 여주 이상 南漢江
상류로 올라오면서 興倉, 可興倉, 牧溪, 忠州, 淸風, 梅捕, 寧越등
큰 마을을 이루고 있어서 祖稅穀이 漢城으로 내려가고 올라올 때
내륙지방에서 식생활에 가장 중요한 소금, 해산물 등 기타

생활 필수품등을 싣고 와서 소규모로 浦口에서 물물교환 상거래가
이루어 졌으나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 인구 증가로 상거래 양이
많아지고 상설시장이 필요함에 따라 지리적 조건을 갖춘
牧溪나루터가 內港으로 크게 발달하였다.

 

 

[안내석 글 내용]


그러나 목계 이상의 상류는 봄, 가을 갈수기에 水深이 얕아
수백섬을 싣는 큰배(장삿배)가 운행할 수 없고 목계 나루에
수십 척이 선착할 수 있는 넓고 깊은 江과 백사장이 있어서
물물 상거래 장소로 편리하고 중부 내륙지방(충복, 강원, 경북)등
육로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어서 보부상들의 상거래가 활발한
모목계로 크게 번성하였으며 한성의 문물을 빨리 받아드리 지역이다.


1930년경 도로 개통 후 차량 등이 배를 이용함으로 오랜 세월
불편이 많았으나 국토종합 건설계획에 의거 牧溪大橋가
1968년 기공식을 갖고 1973년 준공을 보게 되었으며 없어진
목계 나루터가 현 위치 아래 있었다.

 

 

[목계 장터 시비]

 

목계나루터 바로 옆 음식점 마당에도 목계장터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약수물을 먹을 수 있을까?
빨간 작은 바가지가 담기어져 있었다.

 

 

 

신경림의 또 다른 시 몇 수를 소개할까 합니다.

[갈대]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으로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農舞(농무)]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 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조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벼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 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식당안 창가에 머문 봄]

 

[고향길]

 

아무도 찾지 않으려네
내 살던 집 툇마루에 앉으면
벽에는 아직도 쥐오줌 얼룩져 있으리
담 너머로 늙은 수유나뭇잎 날리거든
두레박으로 우물물 한 모금 떠마시고
가위소리 요란한 엿장수되어
고추잠자리 새빨간 노을길 서성이려네
감석 깔린 장길은 피하려네
내 좋아하던 고무신집 딸아이가
수틀 끼고 앉았던 가겟방도 피하려네
두엄더미 수북한 쇠전마당을
금줄기 찾는 허망한 금전꾼되어
초저녁 하얀 달 보며 거닐려네
장국밥으로 깊은 허기를 채우고
읍내로 가는 버스에 오르려네
쫓기듯 도망치듯 살아온 이에게만
삶은 때로 애닯기만 하리
긴 능선 검은 하늘에 박힌 별 보며
길 잘못 든 나그네되어 떠나려네

 

 


[罷場(파장)]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빚 얘기
약장수 기타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싯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식당안 창가에도 봄이 가득 머물고]

 

가난한 사랑의 노래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다시 담아 본 목계 나루터]

 

[파도]

어떤 것은 내 몸에 얼룩을 남기고
어떤 것은 손발에 흠집을 남긴다.
가슴팍에 단단한 응어리를 남기고
등줄기에 푸른 상채기를 남긴다.
어떤 것은 꿈과 그리움으로 남는다.
아쉬움으로 남고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고통으로 남고 미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모두 하얀 파도가 되어 간다.
바람에 몰려 개펄에 내팽개쳐지고
배다리에서는 육지에 매달리기도 하다가
내가 따라갈 수 없는 수평선 너머
그 먼 곳으로 아득히 먼 곳으로
모두가 하얀 파도가 되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