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2. 20. 06:00ㆍ카테고리 없음
일상과 가까이 있지만, 잘 몰랐던 지역의 문화유산을 알아보기 위해
대구교육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대구문화재 톺아보기' 관람을 할 수 있다기에
전화로 여쭈어보고 네비를 찍고 찾아나섰다.
뒤 늦게 대구교육박물관에서 개최하고 있는
전시회를 알게되어 전시회 관람을 하기위해 들렸습니다.
대구문화재 톺아보기
전시기간 : 2020년 12월 18일(금) ~ 2021년 3월 28일(일)
(매주 월요일, 2021년 1월 1일(금), 설날 당일 휴관)
관람시간 : 9:30~18:00(입장마감 17:00)
관람료 : 무료
협조기관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국립기상박물관, 대구광역시립중앙도서관,
대구광역시무형문화재연합회, 대구근대역사관, 대한불교조계종 동화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월곡역사박물관
1. 기록하다
우리의 삶은 다양한 기록의 연속입니다
남기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되는 것도 있고 의도치 않았지만 기록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때의 기록은 문자일수도, 그림일 수도 혹은 어떠한 형태로 만들어져 남겨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남겨진 기록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읽는 소중한 자료가 됩니다.
永世不忘碑(영세불망비)
조선 1737년 대구광역시 중구 경상감영공원 내
관찰사 민응수가 대구를 떠난 3년 후인 1740년 10월,
대구읍성을 쌓으면서 백성에게 선정을 베푼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선정비인 영세불망비가 세워졌다.
撫恤僧徒碑(무휼승도비)
조선 1737년 대구광역시 중구 경상감영공원 내
민응수가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으로 고통 받는 승려를
딱히 여겨 관찰사 재임 중에 일체의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이에 감동한 승려들이 1737년 4월 무휼승도비를 세웠다.
嶺營築城碑(영영축성비) :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호
민응수, 백상휘 / 조선 1737년(영조13년)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1736년에 중수한 대구읍성에 대한 공사과정을 기록한 비석이다.
비문에 따르면 읍성 중수에 동원된 인원은 총 78,534명이고, 1월부터 시작된
공사에는 6개월 정도가 소요되었다. 기존에 토성이었던 것을 석성으로 재건하였으며
완성된 읍성의 둘레는 2.68km, 높이는 대략 3.5~3.8m이었다.
원래는 남문이었던 영남제일관 밖에 새워졌으나 대구읍성이 사라지면서
여러 곳으로 옮겼다가 1980년 현재의 망우당공원 자리에 옮겨졌다.
大邱府修城碑(대구부수성비) /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호
김세호, 최석로 / 조선 1870년(고종7년)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1870년 대구읍성 중수 후 이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비문에 따르면 읍성 수리는 1870년 봄에 시작, 그해 11월에 끝마쳤으며
원래보다 높이와 크기를 키웠고, 정해루, 주승루, 선은루, 망경루의
4개의 누각을 새로 세웠다고 한다.
1906년 성이 헐리면서 1932년 대구향교로 옮겨졌고,
1980년 현재의 망우당공원에 자리 잡았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770년 5월 1일.
영조는 세종조의 옛 제도를 모방하여 측우기를 만들어
창덕궁과 경복궁 및 전국 팔도와 향도에도 설치할 것을 명하여
그 규격을 분명하게 명시하였습니다.
이 즉우대는 '측우대, 건륭경인오월초'라고 새겨져 있고,
실록의 기록과 동일한 크기를 가지고 있어 영조의 명으로
제작한 측우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 경상감영 내 선화당 뜰에 있었던 것으로 1950년
국립기상대로 옮겨져 현재는 국립기상박물관에서 보관, 관리
하고 있습니다.
높이 46, 가로. 세로 37.0cm
조선 1770년(영조 46년)
국립기상박물관 소장
다정하고 따뜻한, 가족의 정
진주 하씨묘 출토 한글편지
조선 17세기 / 국립대구박물관 소장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의 한 무덤에서 많은 유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무덤의 주이는 진주 하씨(1580~1652이후 추정)라 불리는 여성으로 남편은
현풍 곽씨 19대손 곽주(1569~1617)입니다.
발견된 유물 중에서는 집안 인물들 사이에 오고간 172건의 한글편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편지에는 곽주와 하씨 부부를 비롯하여 그들 주변 사람들과 관련된 많은 사연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의 다양한 이야기는 17세기 초 조선이라는 배경만 다를 뿐 오늘을 사는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을 겪어내는 당시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299호
중국 사신단이 조선 방문 시 그들을 맞이하던 일을 수행하던
원접사 정사룡이 1537년 명 사신단을 맞이하여 영접한 상황을
기록한 일기이다.
사신을 맞이한 의례와 지나온 이동거리와 각 읍의 내력,
각 읍 관원들의 영송 예절과 호송 절차 등이 담겨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원접사 일기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필사본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정사룡 / 조선 1537년(광해군2년) /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소장)
명 사신단 대표로 조선에 파견되었던 공용경이 중국을
출발해서 다시 귀환할 때까지의 전 과정에 대해 기록한 책이다.
본인이 받았던 의례와 우리나라의 산천, 각 지방행정구역 등이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이후 명 사신 파견이 있을 때마다
중국과 조선 양국 모두에서 중요한 참고 자료로 함께 조선전기 명 사신행차에
관해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해주는 자료이다.
(공용경 / 조선 1537년(광해군2년) /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소장)
의순관은 의주성 남쪽 2리(0.8km) 지점에 위치해
사신을 맞이하고 배웅하는 장소로 사용된 곳이다.
1572년 조선을 방문한 명 사신단을 의순관에서 맞이하는 모습을
담은 기록화로 화면에서는 의주성을 향해 오는 중국 사신과 그들을
향해 공수 자세로 정렬한 원접사 일행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황의장을 선두로 황제의 조서를 놓은 용정을 따르는 상사와 부사의 행렬이 보인다.
비록 시기는 조금 다르지만 '천사일로일기'와 '사조선록'에 기록된
사신단 영접 영조 의식을 화면으로 볼 수 있는 자료이다.
2. 지키다
우리에겐 국가적인 위기의 순간을 맞이할 때마다
기꺼이 자신을 던진 선조들이 있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그들은 서로를 다독이며 항쟁하였고,
또 다시 찾아올지도 모를 위기를 대비하여 굳건히 나라를 지켜왔습니다.
3. 잇다
문화는 다양한 형태와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역사와 문화적 상호작용에 의해 전승되어 온 기능과 예능인 무형문화재는
우리가 만들어낸, 그리고 오랜 시간동안 우리와 함께 이어져온
문화적 소산으로 전통문화인 동시에 살아 있는 문화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역사나 우리의 문화재를 잘 알아야 우리나라를 지킬 수 있습니다.
가까운 곳이나 먼 곳이라도 행여 근처를 지나치는 일이 있으시다면 한번 들려
천천히 관람하시며 우리것을 알아가는 것도 유익한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저도 사실은 이곳을 다녀오긴 전까지는 교육박물관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우연히 뉴스에서 보고 인터넷으로 감색하여 다녀와게 되었는데,
정말 놀랐어요.
알차게 꾸며놓은 박물관을 둘러보며 죄송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 알고 지켜가야 할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작은 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나라를 사랑하고 지키려는 마음을 갖게 해주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웃님들께 소개를 하며 함께 할 수 있어서 기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