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25. 06:08ㆍ문화산책/정자와 누각
소재지 :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 249
경상북도 기념물 제55호
[채미정 도로 건너 맞은편 주차장 입구 전경]
이곳에 주차를 해 놓고 남편의 배웅을 받으며 혼자 채미정으로 향했다.
마음 놓고 사진을 찍고 돌아오라는 말을 듣긴 하였지만, 그래도 마음은 급하다.
[채미정 앞 계곡 작은 폭포]
녹음이 우거진 숲속으로 들어서니 떨어지는 작은 폭포 물소리가 우렁차다.
[채미정 정화 기념비 뒤면 과 앞쪽 안내판 전경]
앞쪽에 보이는 碑(비)는 채미정 정화 기념비 뒷면이며
앞쪽으로 안내판이 자리하고 있다.
[採薇亭淨化記念碑(채미정정화기념비) 앞면]
[採薇亭淨化記念碑(채미정정화기념비) 앞면 전경]
[정화비 쪽에서 담은 앞 전경]
앞쪽 하마비와 채미정 표석비와
야은 길재 선생의 회고가 시비가 자리하고 있다.
[懷古歌(회고가) 詩碑(시비) 전경]
懷古歌(회고가) / 冶隱(야은) 吉再(길재)
오백 년 도읍지를 匹馬(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依舊(의구) 한 되 人傑(인걸)은 간데없다
어즈버 太平烟月(연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안내판 전경]
길재 선생의 회고가를 보는 순간 고려 말의 학자이자 고려의 儒臣(유신)
耘谷(운곡) 원천석(元天錫, 1330~?) 선생이 생각이 난다.
고려가 멸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원주 치악산에 숨어 살았다.
태종이 간곡히 불렀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
耘谷(운곡) 선생이 지은 懷古歌(회고가)도 올려봅니다.
興亡(흥망)이 有數(유수) 하니 滿月臺(만월대)도 秋草(추초)로다.
오백 년 王業(왕업)이 牧笛(목적)에 부쳤으니,
夕陽(석양)에 지나는 客(객)이 눈물 계워 하노라.
[채미정 안내글 내용]
[채미정 안내도]
[채미정 영문 안내글 내용]
[안내판 앞쪽에서 담은 채미정 흥기문 전경]
고려 말 충절의 학자 冶隱(야은) 길재 선생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정자, 採薇亭(채미정)은 구미 금오산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흥기문 과 구인재 전경]
금오산 깊은 계곡에서 시작된 물은 채미정 앞으로 흘러
내려가고 그 위에 다리를 세워 채미정으로 들어 갈 수 있게 하였다.
[興起門(흥기문) 현판]
[興起門(흥기문)]
채미정으로 통하는 興起門(흥기문)이다.
흥기문은 맹자의 盡心章(진심장)에 나오는 문구이다.
맹자가 백이의 행동을
'百世之下聞者 莫不興起也(백대 후에도 듣는 이에게 감동을 일으키노라)'
라고 한 문장에서 따온 이름이라 한다.
[흥기문에서 담은 우측 채미정 좌측 구인재]
興起門(흥기문)을 들어서면 좌측 求仁齋(구인재),
우측 採薇亭(채미정) 정면으로는 敬墓閣(경모각)이 보인다.
[採薇亭(채미정) 현판]
[採薇亭(채미정) 경상북도 기념물 제55호]
고려 말 학자 吉再(길재)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하여 영조 44년(1768)에 창건되었다.
중앙 1칸은 온돌방으로 꾸미고 사방 둘레에 모두 우물마루를 깔아 대청으로 꾸몄다.
온돌방의 사면에는 각각 2분합 들문을 설치하였으며, 대청 사면이 벽체 없이 개방되어 있다.
잘 다듬은 장대석 기단 위에 원통형으로 치석 한 화강석 주초를 놓고 원주를 세웠다.
[우측에서 담은 採薇亭(채미정) 전경]
채미정은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따먹다가
굶어 죽은 백이 숙제의 고사에서 따온 이름이다.
둘은 상나라 말엽 고죽국 군주의 아들이었다.
주나라 무왕이 부친의 상중에 상나라 주왕을 정벌하는 것을 보고
부자지간의 예의와 군신 지간의 의리를 저버렸다며 수양산에 들어가
나물을 캐 먹고살다가 죽었다.
그들이 굶어 죽기 전에 지은 시가 바로 '채미가'다.
고사리 캐는 노래라는 뜻으로, 節義之士(절의 지사)의 노래를 이르는 말.
백이 숙제하면 떠오르는 시구가 또 있다.
죽음으로 충절을 지킨 성삼문이 지은 詩(시) 한 수
首陽山(수양산) 바라보며 夷劑(이제를) 恨(한) 하노라.
주려 주글 진들 採薇(채미)도 하난 것가.
비록 애 푸새엣 거신들 뉘 따헤 낫다니.
나물 역시 새로운 임금의 땅에 난 것이므로 아무리
풀 한 포기일지라도 먹으면 안 된다는 완강함을 詩(시)에 나타냈다.
[채미정 뒤 영모각과 유허비각 일각문 전경]
야은 길재는 고래 말엽 벼슬을 하였으나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예측하고 낙향하여 금오산에 칩거하였다.
조선이 들어서자 그를 향한 조정의 구애가 끊임없었지만,
그때마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라는 명분으로 이를
거절하였으니 제아무리 태조라 한들 어찌할 수 없었나 보다.
"금오산 한 뙈기는 내 것이 아니로다."
조선을 개국한 이 태조는 길재에게 위와 같은
휘호를 내리며 마침내 그의 영입을 포기하였다 합니다.
백이. 숙제의 절의를 지킨 金烏山人(금오산인) 야은 길재와 채미정
[敬墓閣(경모각) 일각문 전경]
[敬墓閣(경모각) 현판]
[敬墓閣(경모각) 전경]
일각문을 들어 서면 정면에 보이는 경모각이 자리하고 있으며,
경모각 내부에는 길재 선생의 초상화를 모시고 그 옆에는 숙종 임금이
내린 '어필 이언구'가 걸려 있다.
[숙종이 길재의 충절을 기린 어필이언구]
숙종의 '어필' 해석을 옮겨 적어 봅니다.
금오산 아래 돌아와 은거하니
청렴한 기풍은 엄자릉에 비하리라.
성주께서 그 미덕을 찬양 하심은
후인들에 절의를 권장함일쎄'라 적혀 있다.
[遺墟碑閣(유허비각) 전경]
세종이 즉위하던 해인 1419년에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성리학은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등에게 이어졌다.
[遺墟碑(유허비)]
고려 문하주서 야은 길 선생 유허비
숙종 30년(1694)에 선산도호부사 김만증이 세운 것이다.
[유허비각 쪽에서 담은 敬墓閣(경모각) 전경]
圃隱(포은) 鄭夢周(정몽주), 牧隱(목은) 李穡(이색)과
더불어 三隱(삼은)이라 칭해졌던 冶隱(야은) 吉再(길재)
이색. 정몽주 등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고 성균관 박사가 되어 유생들을 가르쳤다.
저서에 '冶隱集(야은 집)'과 언행록인 '冶隱言行拾遺錄(야은언행습유록)'이 있다.
[求仁齋(구인재) 전경]
求仁齋(구인재)는 논어에 나오는 문구이다.
공자의 제자 자공이 공자에게 백이와 숙제가
어떤 사람들인가라고 물으니, 공자가 답하기를 백이와 숙제는
"求仁而得仁又何怨(인을 추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무엇을 후회하겠느냐)"
라고 평했다고 한다.
[求仁齋(구인재) 현판]
[求仁齋(구인재)]
이처럼 맹자와 공자가 백이와 숙제를 칭송한
글에서 길재를 기리기 위한 정자에 이름들을 붙였다.
[求仁齋(구인재) 대청 전경]
대청 뒤쪽으로 열린 2개의 문으로는 보이는 풍경은
두 폭의 그림을 액자에 넣어 걸어 놓은 듯 조화를 이루었다.
[구인재 쪽에서 담은 採薇亭(채미정) 전경]
조선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한 吉再(길재)
조선 500년 역사를 관통하는 동안 줄곧 지조 높은
선비로 추앙을 받게 된 데는 태종 이방원의 공이 컸다 한다.
[채미정 쪽에서 담은 흥기문 전경]
길재는 지금의 구미시 고아읍 봉한리에서 태어나
11세에 아도 화상이 창건했다는 도리사에서 글공부를 했다.
이때 길재는 운명의 인물과 만난다.
그보다 14살이나 어린 이방원이다. 길재는 31살에 사마감시에
급제를 했는데 이방원은 길재보다 1년 앞서 16세의 어린 나이로 급제를 했다.
길재와 이방원은 한동네에 살면서 두터운 정을 쌓았다.
이성계의 아들 중 유일하게 문과급제를 한 이방원은 길재의
됨됨이와 학문을 대하는 태도 등에 깊이 감복했다.
[채미정 앞쪽 담]
세월이 10년쯤 지나 조선 조정에서 연락이 왔다.
개경에 살 때 한동네 살며 학문을 토론하던 이방원이 그를 기억해냈던 것이다.
조선의 실권을 다 틀어쥐고 있던 이방원은 정종을 통해 그를 한양으로 불러들였다.
그에게 주어질 벼슬은 태상박사였다.
한양에 도착한 길재는 이방원을 만나 옛정을 생각해 벼슬자리를
내주는 것에 감사하지만 두 임금을 모시는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므로
철회해 줄 것을 요청했다.
[흥기문쪽에서 담은 채미정과 이어주는 다리]
'나는 고려의 사람이니 조선의 왕이 내린 벼슬을 받아들일 수 없다'
고 왕의 명을 정면에서 거절한 것이다.
목숨을 내거는 결기가 없이는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이방원은 길재의 고사를 받아들였다.
어릴 적부터 오래 교유해온 그의 성정을 인정했던 것이다.
오히려 ‘綱常不易之道(강상불역의 도)’라며 칭찬했다.
길재이므로 가능한 일이었다.
[채미정 돌다리에서 담은 계곡 풍경]
정종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고 집안 형편을 도와주라는 명까지 내렸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개경에 들렀던 것으로 보인다.
개경에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떠나온 지 꼭 11년 만이다.
그는 문을 닫은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 세월의 덧없음,
권력의 허망함, 흥망성쇠의 무상함을 노래했다.
채미정 입구에 세워진 詩碑(시비)에 적힌 詩(시)가 바로 '懷古歌(회고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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