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8. 25. 05:48ㆍ뿌리를 찾아서/忠. 孝. 烈
소재지 :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
[격재선생신도비각과 안내판 전]
앞쪽 안내판에는 혜산서원에 모신 다섯 분의 약력과 서당, 정자의
연혁이 적힌 안내문 옆으로 격재선생 신도비와 안내판이 자리하고 있다.
[格齋先生神道碑閣(벽재선생신도비각)과 앞쪽 안내판 전경]
[격재선생신도비명 입서 글 내용]
孫肇瑞(손조서)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一直(일직). 자 引甫(인보), 호 勉齋(면재). 格齋(격재).
得壽(득수)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永裕(영유)이고, 아버지는 감찰을
지낸 寬(관)이며, 어머니는 金翕(김흡)의 딸이다.
[格齋先生神道碑閣(격재선생신도비각)]
학문과 시문의 대가로서 金宗直(김종직)과 친교가
있었으며, 金宏弼(김굉필). 鄭汝昌(정여창) 등의 제자를 두었다.
[格齋先生神道碑(격재선생신도비)]
세종 14년(1432)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세종 17년(1435) 식년문과에 同進士(동진사)로 급제하였다.
그 해 예문관검열을 거쳐 집현전에 보직되었으며, 知鳳山郡事(지봉산군사)가 되었다.
문종 1년(1451)에 병조정랑을 지냈다.
[格齋先生神道碑(격재선생신도비) 뒤쪽 600년 된 차 나무]
미리 알고 들렸더라면 자세히 담아 왔을 텐데...
돌아와서 자료를 검색하다 알게 되었기에... 담아 온 사진 중에서
차나무 부문만 따로 편집해서 올렸습니다.
[뒤에서 담은 格齋先生神道碑(격재선생신도비) 와 600년 된 차 나무]
세조 2년(1456)에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成三問(성삼문) 등이
살해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충의와 정절로서 두문불출하며
오직 도학에만 전념하였으며, 호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뒤에서 담은 格齋先生神道碑閣(격재선생신도비각) 전경]
꽃나무를 보고 쓰다 / 격재 손조서
園林花漫爛(원림화만란)
숲에 꽃들이 활짝 피니
蛺蝶滿枝來(협접만지래)
온 가지에 나비 날아오네
汝蝶莫貪愛(여접막탐애)
나비야 탐내지 말거라
花非爲爾開(화비위이개)
꽃이 너 때문에 핀 게 아니니
[격재선생신도비 옆 爲光事業有功者記念碑(위광사업유공자기념비)]
분명 기념비이긴 한데...
사연에 대해선 잘 모르니 그냥 통과합니다.
[成均進士永慕齋孫先生遺墟碑(성균진사영모재손선생유허비) 전경]
신도비각 뒤편으로 넓은 공터에는
'成均進士永慕齋孫先生遺墟碑(성균진사영모재손선생유허비)'와
웅장한 노거수 몇 그루가 운치를 자아내고 있었다.
[成均進士永慕齋孫先生遺墟碑(성균진사영모재손선생유허비)와 노거수]
[成均進士永慕齋孫先生遺墟碑(성균진사영모재손선생유허비)옆 노거수 전경]
[成均進士永慕齋孫先生遺墟碑(성균진사영모재손선생유허비) 애니메이션 편집]
[신도비 앞쪽에서 담은 혜산서원으로 가는 골목길 전경]
一直 孫氏(일직 손씨)는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孫凝(손응)의 원래 성은 荀(순) 씨였는데
고려 현종의 이름과 음이 같다 하여 孫(손) 씨로 사성 되었다.
대구 靑湖書院(청호서원) 제향.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저서로는 '格齋集(격재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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