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읍성 조형물

2018. 3. 7. 05:51문화산책/여러 종류의 민속자료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성내1동

 

[도로 건너 북성로 공구골목쪽에서 담은 대구 읍성 조형물 전경]

 

대구 북성로에 '대구읍성'을 상징하는 조형물을 세웠다.
위 사진처럼 돌로 쌓은 읍성 모양의 조형물 중앙에는 대문
좌 우측에 동판에는 읍성과 관련된 설명문과 3개의 외부 스크린에는
중구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 등이 담긴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대구 읍성의 서문 달서문)]

 

"길을 따라 만들어진 새로운 상권들"
대구읍성이 철거된 이후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했던 읍성 밖 땅값이 폭등했고,
십자대로(지금의 중부경찰서 네거리)를 따라 행정관청이 들어섰으며, 주변으로는
일본인 상권이 크게 발달했다.

"일제강점기 대구 최대의 번화가 북성로"
북성로에는 대구 최초의 백화점 미나카이 등 일본인들이 경영하던 상점이 많았다.
대구역과 가까웠기 때문에 물류들이 모이고 빠져나가는 대형 창고들이 들어섰고,
도매상들은 북성로 일대에 밀집해 있었다.

"조선시대 전국 3대 장터, 서문시장"
달서문 밖에는 서문시장이 있었다. 옛 이름은 '대구장'으로 '평양장', 강경장'과 더불어
조선 중기 전국 3대 장터 중 하나였다. 1920년 서남쪽에 있던 성황당 못을 매립하여
오늘의 위치로 옮겼다.(위 글을 옮겨 적음)

 

[달성공원에 옮겨져 있던 망경루]

 

"읍성의 철거를 요구했던 일본인 상인들"
1904년 12월 27일 경부철도 완공과 더불어 1905년 1월 1일 대구역이
개통하면서 북문과 동문 바깥에 터전을 잡고 있던 일본인 상인들은 중심부로
상권을 넓히기 위해 읍성의 철거를 요구했다.

"1907년 철거된 대구읍성"
1905년 11월 일본인 상인들과 일본군 수비대들은 읍성의 허술해진
부분부터 철거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구 군수 겸 관찰사 서리였던 박중양과 일본
거류민단은 '읍성의 철거를 허락하지 않은다'는 조정의 통지가 도착하기도
전에 성벽을 거의 철거해 버렸다.

대구읍성이 철거된 이후 폭 9~10m의 신작로가 들어서면서
현재의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 도로가 만들어졌다.(위 글 옮겨적음)

 

[좌측 옆에서 담은 읍성 조형물 전경]

 

조형물은 대구읍성 상징거리 조성 사업 주요 거점인
북성로 인근의 경관 개선뿐만 아니라 대구읍성을 알리는
역사교육의 場(장)으로도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 한다.

 

[대구읍성 조형물 전경]

 

무슨 일이든 찬성하는 사람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조형물도 반대하는 사람과 찬성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다.

 

[조선시대 당시의 대구 읍성 모습 전경]

[대구읍성의 남문이자 정문인 영남제일관]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축성되었던 대구읍성"
대구읍성은 본래 1590년(선조 23)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쌓은 토성으로,
청도, 영천, 안동, 상주, 부산, 동래, 진주 등의 읍성과 같이 축성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으며, 이후 1736(영조 12) 석성으로 다시 축성되었다.

"대구읍성의 형태"
성의 둘레는 약 2,650m, 성곽의 폭은 약 8, 7m, 높이는 약 3.5m에 이르렀다
영남제일관(), 달서문(), 진동문(), 공북문() 4대문을 기본으로 하면서
부속으로 동소문과 서소문 2소문을 두었으며, 네 모퉁이에는 장대(망루)가 있었다.

읍성 안 북동쪽에는 경상도의 정치. 행정. 군사의 중심이 되었던 경상감영이,
북서쪽에는 관리들이 머물던 객사 달성관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읍성 남서부와
동남부를 중심으로 주거지역이 형성되어 있었다.(위 글 옮겨적음)

 

[우측에서 담은 읍성 조형물 전경]

 

옛 읍성이 있던 구간인데다, 원래 지하철 환풍구가 있던 곳이어서
통행에 크게 불편하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외국인 등이 대구의 관문인
대구역에 도착했을 때 대구가 읍성이 있던 도시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조성한 것이라 한다.

이왕에 세워졌으니 보호하고 자랑스러워했으면 좋겠다.

 

[다시 담아 보는 대구 읍성 조형물 전경]

 

조형물은 높이 5.5m, 가로 9m로
기존 대구읍성의 성벽 돌로 제작하였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