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2. 13. 06:10ㆍ문화산책/고택과 문학관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중앙대로 449(향촌동)
[1층 향촌문화관]
[1층과 2층 계단 중간 그때 그 시절 사진]
[향촌동]
향촌동은 6.25전쟁 당시 전국에서 모여든 문화 예술인들로 인해
당대를 대표하던 시인, 소설가, 화가, 작곡가, 연극영화인, 가수 등이 넘쳐났다.
[나의 인생, 우리의 역사]
대구 중구 도심재생문화재단에서는 '생애사열전 100선 사업'을
추진해오고 있으며, 2012년 부터 발간된 생애사 45권과 기증유물,
사진 자료를 통해 격동의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이웃 어르신들의 삶과
지난 역사를 되짚어 볼 수 있다.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
특히 구상, 조지훈, 이중섭, 이상범, 김동진, 박사춘 등
이들이 대구로 내려오면서 명실상부한 한국문화예술의 중심이 되었다.
1950년대 다방은 한국 문학. 음악사를 증언하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고바우집 주점]
향촌동의 다방, 음악감상실, 주점은 문화와
예술의 열정을 쏟던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였다.
아무 약속이 없어도 낮부터 밤까지 향촌동의 다방,
음악감상실, 주점에 모여들었던 문화예술인들은 피란살이의
고단한 심사를 달래며 문화와 예술에 대한 열정을 쏟았던 곳을
모형과 영상으로 체험할 수 있다.
[백조다방]
백조다방은 홀 중앙에 놓인 그랜드피아노와 바이올린이
명물이었고, 권태호 김동진, 윤용하 등 음악인들이 애용했다.
북성로 모나미와 상록수다방에는 문인들의
출입이 잦았고, 갈매기다방은 영화인들의 회합이 잦았다.
1950년, 60년대를 풍미했던 그들이 드나들던 건물이
아직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전란의 와중에 술 한 잔에
목말라하며 표류하던 골목길도 여전하다.
[문화극장]
대중예술의 요람 광복 직후 5개였던 대구의
영화관은 1960년대에 이르러 개봉관만 7개에 이르렀다.
특히 송죽극장과 자유극장이 마주 보고 있는 골목은
작은 충무로였으며, 목로주점 카스바는 영화인들이 주로 찾았다.
남선악기점 대표 이병주가 설립한 오리엔트레코드사(1947~1955)에서는
한국대중음악사의 주옥같은 곡들이 제작되었다.
당시 오리엔트레코드사에는 박시춘, 이재호, 강사랑,
손로원, 남인수, 백년설, 현인, 백설희, 금사향 등 한국가요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 대부분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여복]
[대여복 2]
대구도심의 역사를 경험했거나 기억하고 있는 주민
100명을 선정하여 격동의 역사속에 묻혀 있던 우리 이웃들의
삶을 통해 지나간 역사를 되짚어 보는시간을 가져본다.
또한 그들이 기증한 유물을 전시하고, 구술 녹취 장소를 구성하여
지속적인 생애사 기록공간으로 만들어나가며, 마지막으로 대구의 역사
연표에 맞춰 개개인의 일생을 기록하는 코너 구성을 통해 나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역사, 역사보존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공간입니다.
[싱가 재봉틀]
옛날 재봉틀의 대명사로 싱가 미싱으로 불렸던 재봉틀이 있었지요.
피난을 오면서도 머리에 이고 가슴에 안고 내려왔다는...
재봉틀 하나에 의지해서 온 식구가 먹고 살았던 그 시절 그때
친정 어머님도 싱가 재봉틀로 우리들의 옷을 만들어 입혔지요.
그때 만들어준 나일론 천의 간따꾸(원피스) 다시 입어보고 싶다.
3층은 대구문학관은 내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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