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 2일 여행 첫날 鎭南館(진남관)

2016. 10. 8. 06:10뿌리를 찾아서

 

 

소재지 : 전라남도 여수시 동문로 11
국보 제304호

 

[진남관 입구에서 담은 망해루 전경]

[공사안내도와 설명글]

[望海樓(망해루) 현판]

[望海樓(망해루)]

[망해루 뒤쪽 통제문 전경]

[충무공 이순신과 여수 진남관 등 안내판]

[진남관임란유물전시관 안내팻말]


아랫쪽 길 한쪽으로 진남관임란유물전시관 안내팻말이
세워져 있었지만, 우선 진남관을 둘러 본 후 들려보기로 하고 통과

 

[統制門(통제문) 현판]

[統制門(통제문) 전경]


統制門(통제문)을 들어서면 곧장 鎭南館(진남관)이다.
이곳이 바로 이순신이 전라좌수영의 본영 지휘소로 삼았던
鎭海樓(진해루) 터 자리에 세운 수군의 중심 기지 鎭南館(진남관)이다.

 

[진남관 안내판 글 내용]

[진남관 보수 정비사업 설명글]

[鎭南館(진남관) 현판]


현판 글씨는 1718년 숙종때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지내며 진남관을 중창한 이제면의 글이라 합니다.

 

[鎭南館(진남관)]


국보 304호인 진남관은 현재까지
전해져 오는 전라좌수영성의 유일한 건축물이다.


숙종 42년(1716) 불에 타버린 것을 1718년
전라 좌수사 李濟冕(이제면)이 다시 건립하였다.

 

[안내문]


강풍으로 인하여 진남관의 천정 부재가 일부 탈락되어
안전을 위하여 잔디 위에서 관람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글이 적혀있었다.
행여 못 보고 올라갈까봐 그랬는지 같은 안내문 글이 나란히 3개가 놓여 있었다.

 

저렇게 해 놓아도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있기에 철통방비를 해 둔 거나 아닌지...

못 들어가지요.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가 손상 될까봐서 사진으로 담기도 조심스러웠다.

 

[좌측에서 담은 鎭南館(진남관)]


남쪽을 진무하다는 의미에서 '鎭南館(진남관)'이라 하였다.


난중일기에는 진해루터에서 공무를 보았다 하고,
이후 1664년 절도사 이도빈이 크고 작은 수리를 하였으나,
1716년 절도사 이여옥 때 대화재로 소실된 것을 1718년
이제면 수사가 다시 중창한 것이 오늘날까지 이르는 건물이라 한다.

 

[鎭南館(진남관) 옆 전경]


건물은 정면 15칸, 측면 5칸, 면적240평의
대형건물로 팔작지붕을 올린 겹처마 단층건물이며
민흘림 원형기둥(68개)을 세웠다.

 

[麗普公立學(여수공립학)]


순종 4년(1910)부터 50여 년 동안 여수공립보통학교와
여수중학교, 야간상업중학원 등의 교실로도 사용되었다 한다.

 

[鎭南館(진남관) 표석]

[좌측 뜰에서 담은 전경]


객사 진남관은 외국 사신과 왕명을 받고 온 대신을 접대하는 곳이며,
또 객사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비와 궐패를 모셔놓고 관아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
또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궁궐을 향해 절하는 '向闕望拜(향궐망배)' 의식을 하며
지방 관리들이 임금을 가까이 모시듯 선정을 다짐하던 곳이다.

 

[統制門(통제문) 전경]

[통제문 옆 麗水石人(여수석인) 전경]

[麗水石人(여수석인) 안내판 글 내용]

[麗水石人(여수석인)]

 

여수는 임진왜란 때 해전의 격전지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전라좌수영으로 있던 이순신 장군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데
이 역시 그와 인연이 깊은 유물이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드느라 한창일 때 왜구의 공격이 심하자 이를
막기 위해 7개의 석인(돌사람)을 만들어 사람처럼 세워 놓았는데,
이로써 적의 눈을 속이어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되었다 한다.

 

전라남도의 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

 

[統制門(통제문)에서 담은 망월루 전경]

[望海樓(망해루)]

 

망해루는 일제강점기에 철거된 것을
1991년 4월 중건한 2층 누각이다.

 

2009년 9월 깨끗하게 새로이 단청을 하여 방문객을 맞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