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위군(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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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율리 南川古宅(남천고택)
소재지 :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 768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64호 [대청 앞쪽에서 담은 남천고택(상매댁) 전경] 대율리 전통마을의 상징은 南川古宅(남천고택)으로, 上梅宅(상매댁) 또는 雙柏堂(쌍백당)등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마을을 돌다보면, 缶林洪氏(부림홍씨) 宗宅(종택) 이 따로 있지만, 그곳보다 이곳이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남천고택(상매댁) 출입구와 돌거북과 안내판 전경] 마침 대문을 열고 나오시는 고택의 주인을 만나게 되었다. 대문을 닫고 자물통으로 채우려 하시기에 허락을 얻기위해 여쭈였지만, 외출중이기 때문이 아니라 외부인 출입을 금한다고 하신다. 속으론 약간 언잖았지만, 그럴 수도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내심 서운하긴하다. 이곳까지 와서 대문밖에서 거부를 당하였으니.....
2017.11.01 -
대율리 缶林洪氏(부림홍씨) 宗宅(종택)
소재지 :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 [缶林洪氏(부림홍씨) 宗宅(종택) 표지석] [마을 돌담길] 이 마을은 돌담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때문에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뽑힐 정도로 운치가 있다. 이 돌담길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부림홍씨 종택이 있다. 한밤마을은 본래 深夜(심야) 또는 大夜(대야)라고 불리던 곳이다. 그러나 1390년경 홍씨 14대손 홍로가 大栗(대율)로 고쳐 불렀다. [缶林洪氏宗宅(부림홍씨종택) 표지석] [宗宅(종택) 삼문] 경북 군위 부계면에 자리한 전통마을로 950년께 남양 홍씨에서 갈려 나온 부림 홍씨의 시조 홍란이란 선비가 입향하면서 촌락을 형성했다. 그 무렵 의홍 예씨, 신천 강씨 등도 마을로 들어왔으나 모두 떠나고 현재는 여양 진씨, 전주 이씨, 예천 임씨, 영..
2017.10.31 -
大栗里(대율리) 大廳(대청)
소재지 :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 858번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62호 [大栗里(대율리) 大廳(대청) 전경] [안내판 글 내용] [大栗洞中書堂(대율동중서당) 현판] 대청에 내걸린 '大栗洞中書堂(대율동중서당)' 현판은 100여 년 전에 완산군이 쓴 친필의 탁본이고, 친필은 분실을 우려해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다 합니다. [大廳(대청) 天障(천장)] [大廳(대청) 전경] 마을 중심부에 있는 누각형 대청 건물이다. 일설에 율리라는 전부락이 사찰지였고, 이 대청은 대종각 자리였다고 한다. 원래 이 대청은 조선전기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 그 후 효종과 숙종 때 각각 다시 수리되어, 예전에는 學舍(학사)로 사용되었으나, 지금는 마을의 경로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大廳(대청) 뒤쪽 전경] 대청..
2017.10.30 -
군위 제2석굴암
소재지 :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 302 국보 제109호 [해탈교와 팔공산 전통문화 교육원 전경] [해탈교 건너 우측 제2석굴암 가는 길] 한국불교태고종에 속한다. 이 절에는 국보 제109호로 지정된 軍威三尊石窟(군위삼존석굴)이 있다. [공덕사적비] [요사채 옆 전경] 이 석굴은 신라 19대 눌지왕때 아도화상이 수도하던 곳이라 하며, 원효대사가 동굴안 삼존불상을 봉안하였다 한다. 또한 지금은 석굴을 보전하기 위해 출입을 금하고 있으며 석굴암 앞에 마련된 제단에서 참배하고 있다. [공덕비] [수리중인 광명선원] [범종각 전경] [팔공산 석굴암 안내 글 내용] 바로 앞쪽에 주차를 해 놓은 트럭 때문에 트럭과 안내판 틈사이로 담아 보았다. 그래도 다행히 글을 읽을 수 있기에 올려봅니다. [안내 글 내용..
2017.10.27 -
陽山書院(양산서원)
소재지 :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 296 [陽山書院(양산서원) 전경] 조선시대의 서원. 부림 홍씨의 세거지로서 고려 말의 문신 洪魯(홍노, 1366~1392년), 조선 전기의 문신 洪貴達(홍귀달, 1438~1504년)과 洪彦忠(홍언충, 1473~1508년)을 배향하고 있다. [陽山書院(양산서원) 표지석과 挹淸樓(읍청루) 전경]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분 선생의 靈位(영위)를 봉안한 廟宇(묘우)를 비롯하여 유생 강학을 위한 興敎堂(흥교당)을 중심으로 立懦齋(입나재), 求仁齋(구인재), 挹淸樓(읍청루), 半畝塘(반무당) 등의 부속 건축물로 그 규모가 방대하였으나, 1868년 高宗(고종) 5년 조정의 서원 철폐령으로 묘우를 비롯한 전 건물이 毁撤(훼철)되는 비운을 겪었다. [안내판 글 내용] [挹..
2017.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