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普門精舍(보문정사)

2015. 12. 21. 06:06문화산책/여러 종류의 민속자료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용동리 29

 

 

[보문정사 전경]


普門精舍(보문정사) 重建記(중건기)
경주시 보문동에 定軒公(정헌공) 휘 鍾祥(종상, 1799~1870)이 
1840년경에 건립하여 후진교육과 학문을 정진 하신곳이라한다.

 

 

[景行門(경행문) 현판]

 

 [보문정사 삼문 景行門(경행문)]

 

보문정사의 삼문인 경행문이 닫혀 있기에

들어가 볼 수가 없어서... 담밖에서 담머너로 담을 수 밖에 없었다.

 

수시로 드나들수 있게 하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관리 때문인듯...

 

 

[담밖에서 담은 普門精舍(보문정사) 현판]


선생은 영특하고 순수한 자질로  文元公(문원공)
晦齋先生(회재선생)의 아우 聾齋先生(농재선생) 가문에 태어났다.


어려서 조부 野隱公(야은공)에게 家學(가학)을 承繼(승계)하여
경전의 大義(대의)를 깨달고 일찍이 문장에 통달하였다.

 

 

[담밖에서 담은 典祀廳(전사청)]

 

한번 司馬試(사마시)에 급제 한 후 다시 進就(진취)에
뜻을 두지 않고 隱居(은거)하여 修己讀書(수기독서)에 힘을 쓰며
더욱 窮究(궁구)하지 못한 바를 깊이 연구하였다.

 

 

[담너머로 담은 보문정사]

 

당시 이름난 선비들과 더불어 性理(성리)를 講論(강론)하여
마침내 大儒(대유)를 이루니 그 명성은 날로 드러났다.

 

 

[보문정사 옆 담]

 

암행어사가 狀啓(장계)를 올리고 觀察使(관찰사)가 薦擧(천거)하여
임금의 부름이  여러 번 내렸고 내외 淸要職(청요직)을 두루 歷任(역임)하였다.

출사하면 선정을 베풀어 치적이 있었고 들어오면 朝著(조저)의
矜式(긍식)이 되었으나 오히려 그 蘊蓄(온축)한 포부를 한 번 펼치지 못하였다.

 

 

[뒷쪽에서 담은 보문정사 전경]

 

鄕里(향리)에 퇴거하여 오직 講學(강학)과
訓誨(훈회)로써 후진을 지도하는 도리를 다하였다,

 

 

[다시 담아 본 보문정사 전경]

 

돌아가신 후 朝廷(조정)에서 선생을 究用(구용)하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겨 높은 벼슬을 追贈(추증)하였고 鄕中(향중)의 士林(사림)이
推仰(추앙) 하여 請諡(청시)의 疏(소)를 올렸다.


時代(시대)가 옛 과 다르고 世上(세상)도 또한
어지러워 미쳐 設享(설향)하지 못 하였다.  
이에 여러 후손들이 祭享(제향) 할 곳이 없음을 慨歎(개탄)하여
몇간의 집을 지어 普門精舍(보문정사)란 편액을 부치고 성의를 다하여 추모하였다.

 

 

[민들레]

 

세월이 흘러 퇴락하게 이르자 다시 상의하여 옛터에 중건 하였다.
2000년(견지년)에 공사 시작하여 2002년(임오년) 봄에 낙성을 하였다.


3월이라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았는데...
민들레는 벌써 얼굴을 내밀고, 봄소식을 전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