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선생 사당및 묘소
소재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신채호선생님을 모신 사당] 20세에 성균관박사가 되었으며, 황성신문의 기자로 논설을 쓰며 을사조약 체결을 단호히 배격하였고, 대한매일신보에 초빙되어 주필로서 국권회복, 민족의식 고취에 공헌하였다. 28세 무렵에 이동녕·안창호 선생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였으며, 1910년 해외에 망명한 후 본격적으로 국사 연구에 힘써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등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안내판 글 내용] [사당앞에 있는 간단한 선생님의 약력을 적은 비문] 1919년 상해임시정부수립 후에는 의정원 전원위원장으로 독립운동에 힘을 기울였고, 1929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旅順(여순)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순국하였다. 뒤늦게 정부에서는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
2015.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