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18. 06:24ㆍ문화산책/정자와 누각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91
사적 제 246호
[金庾信(김유신)장군 집터와 財買井(재매정) 전경]
신라의 명장 金庾信(김유신) 將軍(장군)의 저택으로
추정되는 집자리에 財買井(재매정)이란 신라의 샘이 하나 남아 있다.
신라의 民家址中(민가지중)에 유일하게
史蹟地(사적지)로 지정되어 있는 것이 財買井(재매정)이다.
財買(재매)는 金庾信(김유신) 장군 부인의 이름이라 하네요.
재매부인은 무열왕 김춘추의 셋째 딸 '지소'로
김춘추와 김유신 두 가문을 끈끈하게 연결해 준 고리 역할을 했다.
[金庾信(김유신)장군 집터와 재매정]
金庾信(김유신) 將軍(장군)은 그 부인이
太宗 武烈王(태종 무열왕)의 第 三女(제 3녀, 지소부인)였고
자신은 가야 왕족이었음으로 신라 眞骨(진골)의 품계에 해당하였다.
眞骨(진골)의 집의 규제하지 않는 사항을 보면 담장이
八尺(팔척)을 넘어도 되었고 重門(중문)과 四方門(사방문)을
낼 수 있었으며 마구는 말 5필 이상을 둘 수 있게 규제하지 않았다.
통일신라의 건축규제는 방의 크기에 두고 있는
것을 보면 민가가 큰집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財買井(재매정) 전경]
1991년부터 1993년까지 3년간에 걸쳐
국립 경주문화재 연구소가 재매정 지역을 발굴 조사하였다.
발굴결과 19개소의 건물지가 발굴조사 되었는데
그 중에 가장 큰집이 동서 3칸 남북3칸의 建物址(건물지)였다.
[金庾信(김유신) 장군 출전도]
[안내판 글 내용]
[財買井碑閣(재매정비각) 현판]
[財買井碑閣(재매정비각) 일각문]
1993년 財買井(재매정) 지역 발굴조사는
재매정을 중심으로 사방 70m 지역을 발굴하였다.
발굴과정에서 財買井(재매정)의 신라 우물을 실축 조사하였다.
발굴자는 財買井宅(재매정택)은 현 발굴지역의
동편이나 서편지역에 더 큰 건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재매정비각과 재매정]
선덕여왕 13년(644) 蘇判(소판)이 된 김유신은
연달아 여러 차례 백제와의 싸움에 출정했는데,
싸움터에서 돌아오자마자 가족을 만날 틈도 없이 곧장
다른 싸움터로 보내지는 일이 거듭되었다.
[財買井(재매정)]
그래서 집안에는 들어가지도 못한 채
집 문앞을 그냥 지나가게 되었는데, 50걸음쯤 가다가
멈춰서 자기 집 우물에서 물을 떠오라고 시켜 마셨다.
"우리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
라고 말한 뒤 계속하여 길을 재촉하여 나아갔다.
이렇게 가족과의 이별을 한탄하지 않고
의연하게 싸움터로 나가는 김유신의 태도는 이를 지켜보던
군사들에게 귀감이 되어 그들을 싸움터로 이끌었다고 한다.
우물의 깊이는 5.7m이며, 가장 넓은 부분은 1.8m이고,
바닥의 지름이 1.2m로 벽돌같이 다듬은 돌로 만들었다.
신라 우물의 방틀은 圓形(원형)인 것과 方形(방형)인 것과 팔각형인 것이 있다.
[財買井碑閣(재매정비각) ]
[財買井碑(재매정비)]
현재 財買井(재매정) 옆에는 遺虛碑(유허비)가 있는데
조선 고종 9년(1872) 慶州付尹(경주부윤) 李晩運(이만운)이 쓴 것으로...
新羅太大角干開國公金先生遺墟碑
신라태대각간개국공김선생유허비 라 새겨져 있다.
[재매정 앞쪽 전경]
옛터에 비를 세운 것은 그곳을 소중히 하기 위해서겠지요.
또 조상을 추모하고 근본에 보답하는 뜻이기도 하구요.
우물앞에 있는 주춧돌은 아직도 생생히 그날을 기억하고 있겠지요.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며, 다시 담아 본 재매정과 비각 전경]
김유신의 부인을 '재매정댁' '재매부인'이라 불렀다한다.
집안에서 중요시 여기는 것이 우물인데
아마 정부인의 택호를 따서 우물의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닐까 미루어 짐작한다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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