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10. 06:43ㆍ문화산책/정자와 누각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984-3
지정번호 : 제 26호
[子規樓(자규루) 협문]
자규루에 들리려 찾아왔지만,
협문은 자물쇠로 잠기어 있었다.
협문이 닫혀있어서 들어갈 수 없기에 밖에서 사진으로 담고 돌아서려는데,
지나가던 아저씨 한분이 저쪽으로 좀더 올라가면,
정문이 있으니 그곳을 통해 들어가면 된다고 알려주신다.
[바같 도로에서 담은 子規樓(자규루) 전경]
세조 2년(1456) 6월 28일, 단종이 청령포에 유배되었다가
홍수 때문에 이곳으로 옮겨와 머물던 중에 2차 단종복위사건으로 인해
세조의 명으로 금부도사 王邦衍(왕방연) 가지고 온 사약과
貢生(공생) 禍得(화득)교살에 의해 1457년 10월24일 사사된 곳이라고 한다.
또한 김삿갓이 20세 되던 해 조부의 행적을 모르고 조부를
신랄하게 탄핵하는 글을 지어 장원한 곳이기도 하다.
[觀風軒(관풍헌) 정문]
이곳을 통하여 관풍헌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그러나 어디에도 관풍헌과 관계된 팻말을 볼 수가 없었다.
기둥엔 '보덕사청년회' '보덕사포고당' 이라고만 적혀있어서
지나칠뻔 한 것을 지나가는 사람에게 또 다시 물어보고야 알게 되었다.
현재는 조계종 보덕사에서 포교당으로 이용하고 있다.
관풍헌이 있는 객사의 정문을 白雲樓(백운루)
江原道誌(강원도지)에는 觀風樓(관풍루)라고 표기되어 있다한다.
[관풍헌 안내판 글 내용]
바같에 안내판을 세워두었거나, 아니면 관풍헌이나 자규루란 현판을
함께 걸어두었더라면 쉽게 찾을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삼문쪽에서 담은 약사전]
관풍헌은 조선시대 지방의 업무를 처리하던 관청건물로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건물과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객사의 가운데 집은 높게 지어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와 '궐'패를 모셔놓고
사또가 한 달에 두 번씩 임금께 고하듯이 고을을 잘 다스리고 보고하는 곳이라한다.
양쪽 날개집은 중앙정부 관리가 이곳에 내려올 때 머무는 곳이라한다.
[觀風軒(관풍헌)]
觀風軒(관풍헌)은 영월 객사의 東軒(동헌) 건물로서
영월읍 중앙로에서 동강1교 방향으로 약 700m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태조 1년(1392)에 객사와 함께 건립되었다.
동헌 동쪽에 있는 누각을 梅竹樓(매죽루)또는 子規樓(자규루)라 하기도한다.
이 누각은 세종 10년(1428) 영월군수 申潚根(신숙근)이
창건하여 梅竹樓(매죽루)라 하였다.
후에 단종이 이곳 객사에서 거처하였고 이 누각에 올라 자신의
고뇌를 子規詞(자규사) 및 子規詩(자규시)로 읊은것이 계기가 되어
누각의 이름이 子規樓(자규루)로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누각 앞쪽에는 子規樓(자규루)란 현판이 걸려있고,
뒤쪽에는 梅竹樓(매죽루)란 현판이 걸려 있다.
[촤측에서 담은 觀風軒(관풍헌) 전경]
子規詩(자규시)
一自寃禽出帝宮(일자원금출제궁)
원통한 새가 되어 궁궐을 나온 후로
孤身隻影碧山中(고신척영벽산중)
외로운 그림자 산중에 홀로 섰네
假眠夜夜眠無假(가면야야면무가)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 못 이루고
窮恨年年恨不窮(궁한년년한불궁)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어라
斷聲曉岑殘月白(성단효잠잔월백)
두견새 소리 그치고 조각달은 밝은데
血流春谷落花紅(혈류춘곡낙화홍)
피눈물 흘러서 지는 꽃이 붉구나
天聾尙未聞哀訴(천롱상미문애소)
하늘도 저 하소연 듣지 못하는데
何奈愁人耳獨聽(하내수인이독청)
어찌 시름 젖은 내게만 들리는고
제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어린 임금의 애처로움과 비통함이
절절히 묘사돼 있어 읽는 이의 가슴을 숙연케 한다.
[자규루 노거수와 안내판 전경]
[자규루 안내판 글 내용]
[梅竹樓(매죽루)와 안내판 전경]
단종은 매일 梅竹樓(매죽루)에 올라
밤이면 사람을 시켜 피리를 불게 하였습니다.
그럴 때면 그 소리가 먼 마을까지 들렸다고 합니다.
[梅竹樓(매죽루)]
원래 이 누각은 객사에 딸린 정자로 세종 10년(1428) 영월군수였던
신근권이 세워서 '梅竹樓(매죽루)'라 불리웠으나 단종이 樓(루)에 올라
'피를 토하듯 운다' 는 두견새(杜鵑: 一名 子規)의 한을 자신과 비교하여
시를 읊었다고 하여 그 시를 자규사라 하고 이 樓(루)를 자규루라고도 부른다.
단종이 관풍헌에 머물 때 이 누각에 올라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습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난 뒤인 그해 11월에 쌀쌀한 이곳 관풍헌 앞뜰에서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때 나이가 불과 17세였습니다.
子規詞(자규사)
月白夜蜀魂추(월백야촉혼추)
달 밝은 밤 두견새 울 제
含愁情依樓頭(함수정의누두)
시름 못 잊어 누 머리에 기대어라
爾啼悲我聞苦(니제비아문고)
네 울음 슬프니 내 듣기 괴롭구나
無爾聲無我愁(무니성무아수)
네 소리 없었던들 내 시름 없을 것을
寄語世苦榮人(기어세고영인)
세상에 근심 많은 이들에게 일으노니
愼莫登子規樓(신막등자규루)
부디 자규루에는 오르지 마오
그 후 선조 38년(1605) 큰 홍수로 인하여 이 누각이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민가가 들어설 정도로 폐허가 되었으나 정조15년(1791)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이 그 터를 찾아 복원하였다.
[다시 담아 본 梅竹樓(매죽루)]
17세의 어린 나이, 요즘으로 치면 고등학교 1학년 쯤
되었을 소년인데 이토록 성숙하고 그 詩才(시재) 또한 놀랍다.
보위를 그대로 지켰더라면 성군이 되었을지도....
단종이 이처럼 시를 읊어 울적한 심사를 달래며 유폐생활을 하는 동안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여섯째 숙부 錦城大君(금성대군)이 단종 복위운동을 하다가
발각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불행히도 거사를 해 보기도 전에 밀서가 발각되어
수 많은 사람이 죽고 화가 단종에게까지 미칠 줄을 어찌 알았으랴.
사람의 운명이란 하늘에 달린것을....애닯다 어이하리...
[자규루 뜰 노거수]
단종을 살려 두고서는 복위운동이 그치지 않으리라고
판단한 수양과 그 추종자들은 단종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금부도사 王邦衍(왕방연)을 보내어 사형을 집행케 했다.
왕방연이 왕명을 어기지 못하여 사약을 가지고 관풍헌에
당도했으나 차마 입이 열리지 않아 집행을 못한 채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이때 貢生(공생) 福得(복득)이란 자가 단종의
뒤에서 활시위로 목을 졸라 비참한 최후를 맞게 했다고 한다.
단종이 숨을 거두자 시신은 東江(동강)에 버려졌고,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는데 영월 戶長(호장)이었던
아전 嚴興道(엄흥도)가 밤에 몰래 시신을 거두어 도망하다가
노루가 튀어 달아나는 곳에 눈이 녹았음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시신을
가매장한 후 온 가족과 함께 종적을 감추었다.
[관풍헌에서 담은 삼문 전경]
지금의 단종왕릉인 莊陵(장릉) 자리가 바로 그 자리이고
풍수가들이 보아도 천하의 명당이라고 하니 하늘도 무심치 않았나 보다.
조선왕조 역대 임금 가운데 유일하게 國葬(국장)을 치르지 못한
'비운의 왕' 단종. 승하한지 550년만에 國葬(국장)으로 치루었다.
단종이 사약을 받고 승하한 관풍헌을 출발해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창절서원에서 노제를 지낸 뒤 장릉까지 이어진 5백여 미터에 이르는 국장 행렬은
철저한 고증을 거쳐 진행하였으며, 장릉에 국장 행렬이 도착하자 단종의 천도를 기원하는
의미로 만든 모형 말인 죽안마를 불태우고 궁중 제례의식에 맞춰 제향제례를 성대히 치루었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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