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23일(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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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율리 敬義齋(경의재)
소재지 :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 [敬義齋(경의재) 출입문] 출입문은 열려 있었지만, 들어가지 못하였다. 관리인인듯 한 어르신께서 풀을 뽑고 계셨기에 잠시 들어가 사진만 찍고 나오면 안되겠느냐 여쭈였더니, 단칼에 "안되요" 하신다. 저도 두말 않고 뒤돌아섰지만, 그냥 올 수는 없지요. 대문 밖에서 스맛폰으로 멀리서, 줌으로 당겨서 담아 오면서 안내판과 건물사진만 찍고 나오는데... 하고 속으론 서운하게 생각을 하였지만, 다녀와서야 그 이유를 알고는 서운했던 마음이 죄송함으로 바뀌었어요. 관광객의 무질서가 마음문을 닫게 하였다는것을... [밖에서 담은 경의재 전경] 이 건물은 조선조 정조 을해(1779)년 휘 귀응 호 남천공이 족친들과 힘을 모아 한 체의 공당을 창건하고 이름을 異塾(이숙)이라 불렀..
2017.11.02 -
대율리 缶林洪氏(부림홍씨) 宗宅(종택)
소재지 :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 [缶林洪氏(부림홍씨) 宗宅(종택) 표지석] [마을 돌담길] 이 마을은 돌담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때문에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뽑힐 정도로 운치가 있다. 이 돌담길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부림홍씨 종택이 있다. 한밤마을은 본래 深夜(심야) 또는 大夜(대야)라고 불리던 곳이다. 그러나 1390년경 홍씨 14대손 홍로가 大栗(대율)로 고쳐 불렀다. [缶林洪氏宗宅(부림홍씨종택) 표지석] [宗宅(종택) 삼문] 경북 군위 부계면에 자리한 전통마을로 950년께 남양 홍씨에서 갈려 나온 부림 홍씨의 시조 홍란이란 선비가 입향하면서 촌락을 형성했다. 그 무렵 의홍 예씨, 신천 강씨 등도 마을로 들어왔으나 모두 떠나고 현재는 여양 진씨, 전주 이씨, 예천 임씨, 영..
2017.10.31 -
大栗里(대율리) 大廳(대청)
소재지 :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 858번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62호 [大栗里(대율리) 大廳(대청) 전경] [안내판 글 내용] [大栗洞中書堂(대율동중서당) 현판] 대청에 내걸린 '大栗洞中書堂(대율동중서당)' 현판은 100여 년 전에 완산군이 쓴 친필의 탁본이고, 친필은 분실을 우려해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다 합니다. [大廳(대청) 天障(천장)] [大廳(대청) 전경] 마을 중심부에 있는 누각형 대청 건물이다. 일설에 율리라는 전부락이 사찰지였고, 이 대청은 대종각 자리였다고 한다. 원래 이 대청은 조선전기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 그 후 효종과 숙종 때 각각 다시 수리되어, 예전에는 學舍(학사)로 사용되었으나, 지금는 마을의 경로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大廳(대청) 뒤쪽 전경] 대청..
2017.10.30 -
군위 제2석굴암
소재지 :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 302 국보 제109호 [해탈교와 팔공산 전통문화 교육원 전경] [해탈교 건너 우측 제2석굴암 가는 길] 한국불교태고종에 속한다. 이 절에는 국보 제109호로 지정된 軍威三尊石窟(군위삼존석굴)이 있다. [공덕사적비] [요사채 옆 전경] 이 석굴은 신라 19대 눌지왕때 아도화상이 수도하던 곳이라 하며, 원효대사가 동굴안 삼존불상을 봉안하였다 한다. 또한 지금은 석굴을 보전하기 위해 출입을 금하고 있으며 석굴암 앞에 마련된 제단에서 참배하고 있다. [공덕비] [수리중인 광명선원] [범종각 전경] [팔공산 석굴암 안내 글 내용] 바로 앞쪽에 주차를 해 놓은 트럭 때문에 트럭과 안내판 틈사이로 담아 보았다. 그래도 다행히 글을 읽을 수 있기에 올려봅니다. [안내 글 내용..
2017.10.27 -
陽山書院(양산서원)
소재지 :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 296 [陽山書院(양산서원) 전경] 조선시대의 서원. 부림 홍씨의 세거지로서 고려 말의 문신 洪魯(홍노, 1366~1392년), 조선 전기의 문신 洪貴達(홍귀달, 1438~1504년)과 洪彦忠(홍언충, 1473~1508년)을 배향하고 있다. [陽山書院(양산서원) 표지석과 挹淸樓(읍청루) 전경]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분 선생의 靈位(영위)를 봉안한 廟宇(묘우)를 비롯하여 유생 강학을 위한 興敎堂(흥교당)을 중심으로 立懦齋(입나재), 求仁齋(구인재), 挹淸樓(읍청루), 半畝塘(반무당) 등의 부속 건축물로 그 규모가 방대하였으나, 1868년 高宗(고종) 5년 조정의 서원 철폐령으로 묘우를 비롯한 전 건물이 毁撤(훼철)되는 비운을 겪었다. [안내판 글 내용] [挹..
2017.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