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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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隅谷亭(우곡정)
소재지 :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사곡리 1326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5호 [隅谷亭(우곡정) 전경] 隅谷亭(우곡정)은 고려말 대사헌을 지냈던 우곡 정온이 조선 태조의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조용히 지내고자 태조 2년(1393)에 지은 정자이다. [우곡정 우측편 전경] 우곡정에 들렸는데, 우측 조금 떨어진 곳에 비와 열려각이나 효자각 그 옆으로 커다란 시비가 보여 궁금하여 우선 이곳부터 들려보기로 하였다. [굼실촌 향가 碑(비)] [굼실촌 향가 碑文(비문)] [孝烈閣(효열각) 현판] [孝烈閣(효열각) 전경] 부부가 효자 열녀 부모님을 정성을 다해 모시고 열일곱 어린 나이에 어머님 병환중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기력을돌아오게 하였으며, 돌아가신 후에는 삼년상을 정성을 다하고, 남편 병중..
2019.12.23 -
儉齋(검재) 金楺(김유) 신도비와 묘역
소재지 : 경기도 의왕시 왕곡동 산 8 번지 [정면에서 담은 金楺(김유) 神道碑(신도비) 전경] 묘역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神道碑(신도비) [뒤쪽에서 담은 金楺(김유) 神道碑(신도비) 전경] [옆쪽에서 담은 金楺(김유) 神道碑(신도비) 전경] [신도비쪽에서 담은 儉齋(검재) 金楺(김유) 묘역 전경] 金楺(김유, 1653~1719) 본관 淸風(청풍) 자 士直(사직), 호 儉齋(검재), 관찰사 澄(징)의 아들. 朴世采(박세채). 宋時烈(송시열)의 문인.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박세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儉齋(검재) 金楺(김유) 묘 전경] 일찌기 학문에 조예가 깊어 朴世采(박세체)가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하였으며, 宋時烈(송시열)도 그의 재주를 중히 여겼다 한다. [儉齋(검재) 金楺(김유) 묘] 현종 15년(..
2016.12.02 -
趙光祖先生(조광조선생)의 묘역과 絶命詩碑(절명시비)
소재지 :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산55-1 [한양조공정암선생묘역 안내 표지석] 趙光祖(조광조,1482~1519) 중종 5년(1515) 사마시에 합격한 후, 새롭게 변화를 모색하고 있던 시대적인 분위기를 타고 관직에 나섰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 유교로 정치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至治主義(지치주의)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고 향촌의 상호부조를 위하여 '呂氏鄕約(여씨향약)'을 8도에 실시하였다. [표지석 뒷면] 金銓(김전). 남곤. 高荊山(고형산). 심정 등은 熙嬪洪氏(희빈홍씨)의 아버지인 홍경주를 중심으로 희빈홍씨를 통해 '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갔다'고 과장하면서 그대로 둘 경우 왕권까지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走肖爲王(주초위왕)'이라는 글자를 나뭇잎에 새겨 왕이..
2016.08.05 -
보백당 김계행 신도비각
소재지 :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묵계서원 옆) [보백당 김계행 신도비각 전경] "내 집엔 보물이 없고, 보물이란 오직 청백뿐이다" 라는 유훈을 남긴 보백당 김계행 선생(1431~1517년). 그는 일생을 대쪽정신으로 청렴결백하게 살다 간 선비였다. [보백당 김계행 신도비각] 보백당 사후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인 1858년, 사림과 문중은 그동안 묻혀있던 보백당의 삶과 학덕을 기리는 포상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려 이조참판(종2품)을 증직 받는다. 종2품 증직으로는 보백당의 공적이 충분히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1859년 다시 1품계 이상의 증직과 시호를 받게 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보백당 김계행 신도비] 이에 조정은 그의 충효와 청백한 인품, 학덕을 인정해 판서의 증직과 시호를 내리는 것이 ..
2016.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