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신라왕릉 둘러보기 神文王陵(신문왕릉)

2015. 12. 11. 06:41뿌리를 찾아서/왕릉 답사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453-1
사적 제 181호

 

 

[왕릉의 삼문 弘禮門(홍례문) 전경]

 

[弘禮門(홍례문)과 안내판 전경]

 

[신문왕릉 안내판 글 내용]

 

[열린 삼문에서 담은 신문왕릉]

 

[정면에서 담은 神文王陵(신문왕릉) 전경]

 

神文王(신문왕)의 이름은 政明(정명), 또는 明之(명지)이며, 자는 日炤(일초).
부왕인 문무왕을 위해 '感恩寺(감은사)'란 절을 세우기도 한 왕이다.

어머니는 慈儀王后(자의왕후), 비는 神穆王后(신목왕후)이다.

 

 

[우측에서 담은 神文王陵(신문왕릉) 전경]

 

왕릉 앞 소나무가 왕릉을 향해
절을 하듯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신기해 보였다.

 

 

[릉앞 상석]

 

지방 행정 제도를 정비하여 전국을 9주로 나누고 국학을 설치하여 학문을 장려하였다.
봉성사와 망덕사같은 대사찰을 창건하여 불교를 발전시키고, 녹읍을 폐지하여
귀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켜 왕권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당과의 문물교류를 확대하여 문화를 융성하게 하여 강수나 설총같은
대학자를 배출하는 등 신라의 전성기를 이룩한 왕이다.

 

 

[신문왕릉 옆 전경]

 

능은 원형 봉토분으로서 길이는 29.3m이고 높이는 7.6m이다.
밑 둘레는 벽돌 모양으로 다듬은 돌을 五段(5단)으로 쌓고
그 위에 甲石(갑석)을 덮은 護石(호석)에 단면 사각형으로 가공한
석재를 수십개 돌려 받쳐주고 있다.

 

호석 받침돌 가운데 남쪽을 향하고 있는 석재에서

'門(문)'이라 음각된 것이 발견되었는데, 그 뜻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릉과 홍례문]

 

릉의 외부모습은 둥근 봉토분이다.

밑둘레에는 벽돌모양의 잘 다듬은 돌을 사용해 담장을

쌓아올리듯 5단으로 쌓고 그 위에 갑석(甲石)을 올려 무덤 보호석으로 하였다.

 

가로, 세로 90㎝, 두께 50㎝ 되는 다듬은 돌을 대각선으로 곱게 잘라내어 만든

삼각형 받침돌 44개를 호석에 등간격으로 받쳐 무덤 외부를 매우 튼튼하게 하였다.

 

 

[뒤쪽에서 담은 신문왕릉]

 

호석 밖에 欄干(난간) 장식이나 十二支神像(십이지신상) 등은 보이지 않으며,
그의 石獅子(석사자), 文人石(문인석), 武人石(무인석)의 배치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王陵(왕릉)의 호석은 일부가 땅 속에 묻혀 있었으나
1970년대에 원형을 복원하고 철책을 둘러서 보호하고 있다.

 

 

[좌측 옆에서 담은 릉과 상석]

 

王陵(왕릉)의 동쪽에는 石床(석상)이 있는데 聖德王陵(성덕왕릉)의
석상에 비해 비교적 얕고, 석재도 고르지 못하여 원래의 석상인지 의심스럽다.
이 석축을 지탱하기 위해 44개의 호석을 설치하였다.

 

 

[신문왕릉 묘표]

 

신문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순탄치 않은 길을 걸었다.
즉위하던 해인 681년 8월에 장인인 김흠돌을 비롯한 波珍飡(파진찬)
興元(흥원), 大阿飡(대아찬) 眞功(진공) 등의 모반사건이 일어나 이 난을 평정하였다.

 

 

[릉쪽을 향해 가지를 뻗은 노거수]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왕권전제화의 계기를 만들어주었으며,
김흠돌이 반란을 일으킨 원인은 상세히 알 수 없으나 왕비인 그의 딸이
아들을 낳지 못한 사실과 모반사건 바로 전에 眞福(진복)이 上大等(상대등)에
임명된 사실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신문왕은 주동자뿐만 아니라

말단 가담자까지도 철저히 숙청하였으며, 왕비 김씨도 폐위시켰다.

 

 

[담옆 노거수]

 

'三國史記(삼국사기)'에 의하면 692년 7월에 왕이 돌아가시자
諡號(시호)를 神文(신문)이라 하고, 狼山(낭산) 동쪽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능은 낭산의 남쪽 방향에 있고

'三國史記(삼국사기)''三國遺事(삼국유사)'에서
望德寺(망덕사) 동쪽에 있다고 한 孝昭王陵(효소왕릉)과 그 위치가

부합되므로 이 능은 효소왕릉이며, 신문왕릉은 낭산 동쪽인 皇福寺址(황복사지)

아래에 십이지석이 남아 있는 폐왕릉일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