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17. 07:01ㆍ추천합니다/관광지와 휴게실
소재지 :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사인암리
[안내판과 역동선생 기적비 전경]
우탁 선생은 고려시대 대학자로 금수산 자락 아래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 신원동에서 태어났는데,
인근에서는 새원이라고도 부른다.
금수산의 정기를 받은 적성 땅에는 '새'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세 곳 있는데, 새원이. 새터. 새말 등이다.
이른바 큰 인물이 태어난다는 품달촌으로
새원이에서는 우탁 선생이, 새터에서는 조선시대의 명필이며
대학자인 지수제와 유척기 선생이 태어났다.
[안내판]
[안내판 글 내용]
[嘆老歌(탄로가) 詩碑(시비) 전경]
[嘆老歌(탄로가)]
[嘆老歌(탄로가) 詩碑(시비) 전경]
[嘆老歌(탄로가)]
[嘆老歌(탄로가) 詩碑(시비) 전경]
[嘆老歌(탄로가)]
후세에 전하는 역동 선생의 시조로는
청구영언에 '춘산에 눈 녹인 바람'과 늙음을 한탄한
'嘆老歌(탄로가)' 2수를 남김으로써 국문학사의 큰 획을 그었다.
[易東禹先生紀蹟碑(역동우선생기적비) 전경]
禹倬(우탁, 1263~1342년 ) 문신, 학자
본관 丹陽(단양) 자 天章(천장), 卓甫(탁보, 卓夫(탁부),
호 白雲(백운), 丹巖(단암), 易東(역동), 시호 文僖(문희)
세상에서 '易東先生(역동선생)'이라 일컬어졌다.
시조 禹玄(우현)의 7대손으로,
南省典書門下侍中(남성전서문하시중)으로
증직된 禹天珪(우천규)의 아들이다.
충렬왕 4년에 향공진사가 되면서 관직에 나섰는데,
선생의 성품을 잘 보여주는 한 가지 일화가 전해진다.
[易東禹先生紀蹟碑(역동우선생기적비)]
易東禹先生紀蹟碑(역동우선생기적비) 뒤 면]
1308년 충선왕 즉위년, 우탁 선생이 감찰규정으로 있을 때 일이다.
왕에 오른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인 숙창원비와 통간한 일이 생겼다.
우탁 선생은 흰옷에 도끼를 들고 거적을 메고 대궐로 들어가
극간을 하였는데, 왕의 곁에 있던 신하가 상소문을 펴들고 감히 읽지를 못하였다.
[보호수(소나무) 전경]
단양군 보호수 제12호
지정 : 1993년 8월 28일
수종 : 소나무(수령 : 100년)
[기적비쪽에서 담은 앞쪽 전경]
이에 우탁 선생이 호통을 치며 말하기를
"경이 근신이 되어 왕의 그릇된 것을
바로 잡지 못하고 악으로 인도하니 그 죄를 아느냐?"고
꾸짖으니 좌우의 신하들이 어쩔 줄 모르고, 왕도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벼슬에서 물러난 후 예안현 지삼리에 은거하며
당시 원나라를 통해 새롭게 유입되던 정주학을 연구하여
후학들에게 전해 주었다.
[기적비 아래쪽 개울 물]
특히 程頤(정이)가 주석한 '易經(역경)' 程傳(정전)이
처음으로 들어왔으나 이를 아는 사람이 없자 방문을 닫아걸고 연구하여
달포만에 이를 터득하고 후진에게 가르치니 비로소 성리학을 행하게 되었다.
이에 중국의 학자들이 중국의 易(역)이 東(동)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하여 선생을 易東(역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길 건너에서 담은 역동 우선생 기적비 전경]
經史(경사)에 통달했고, '고려사' 열전에
'易學(역학)에 더욱 조예가 깊어 卜筮(복서)가 맞지 않음이 없다.'고
기록될 만큼 아주 뛰어난 역학자였다.
또한 시조 2수와 몇 편의 시가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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