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 12. 06:42ㆍ뿌리를 찾아서/忠. 孝. 烈
소재지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
충청북도 기념물 제30호
[의암 손병희선생님 유허지 홍살문]
1861년 4월 8일 현재의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에서 청주관아의 서리인
손의조와 둘째부인 경주 최씨 사이의 서자로 태어나 1922년 5월 19일 62세로 서울에서 순국하였다.
어려서부터 의기있는 남아로 품성이 호탕하고 불의에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며 약하고 불우한 사람을 도우려는 의협심도 남달리 뛰어났다.
12세 때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관청에 공금을 내러 가는 길에
눈길에 쓰러진 사람을 보고 관청에 내야 할 공금을 몽땅 털어 그 사람의 구휼비로 섰으며,
옥에 갇힌 친구 아버지의 석방을 위하여 친구에게 자기 집의 돈 있는 곳을 알려줘
그 돈으로 친구아버지를 풀려나게 한 적도 있었으나,
전통사회에서 서자의 신분이란 천대와 수모가 뒤따르게 마련이었다.
그는 이같은 차별 대우를 20대 전후에 경험적으로 뼈저리게 느꼈으며,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를 깨닫게 되어 절망과 울분은 더욱 쌓여 갔다.
청주 일대를 다니면서 호탕방일한 생활로 한때나마
빈축을 샀던 것은 이같은 가정적 배경 때문이었다 한다.
유물전시관에 전시된 사진과 자료들을 올려봅니다.
[의암 손병희선생 초상화]
[손병희선생 성격]
[선생의 사상과 하루라도 독서를 하지 않으면 심신이 개운치 않는다는 뜻의 선생의 글씨]
1882년 22세 때 동학에 입교한 후 최시형의 수제자로 익산 사자암과 공주의 가엽사에서
수도하고 1893년 보은사에서 초대 교주 崔濟愚(최제우)의 신원운동을 주도 南接(남접)의
全琫準(전봉준)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호남과 호서지방을 석권하고 북상하다가 일본군의
개입으로 패전하고 말았다.
말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동학에 쏟는 그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이러한 열성과 지도력을 인정받아 교주로부터 義菴(의암)이라는 호를 받았으며
교주 최시형이 체포되어 서울 감옥에서 처형된 뒤 그 뒤를 이어 교주가 되었다.
[전시관 내부]
[전시관 내부 2]
1914년 4월 8일 촬영된 의암 손병희 선생 53회 생신 기념사진
가운데 중앙에 계신 분이 의암 손병희 선생, 앞줄 왼쪽 두 번째 계신 분이 의암 선생의 사위인 소파 방정환
[전시관 내부 3]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을 기념하여 들어오는 광장에 33개의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의암 손병희(1861~1922)는 근대가 낳은 종교가‧혁명가‧교육가‧언론인이며 애국자인
인내천의 실천자이며 한 몸으로 동학농민운동(1894년). 갑진개화혁신운동(1904년).
3‧1운동(1919년) 등 굵직한 개혁개화운동을 앞장서서 주도적으로 실천한 사상가이기도 하였다.
일제의 강압으로 활동이 여의치 않게 되자 해외망명의 길을
결심하게 되었으며, 1901년 상해로 망명하여 李祥憲(이상헌)으로 개명하고
중국의 孫文(손문)과 국제정세를 논하는 등 국제적 활동에 전력하기도 하였다.
이 때는 러. 일전쟁이 일어난 해로서 일본의 위세는
높아만 갔고 한반도 침략야욕이 점점 확산되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국내. 외 정세에 대처하기 위해 1904년 권동진, 오세창 등과 함께 일본에서
進步會(진보회)를 결정하고 이용구를 국내로 파견, 국내 조직을 강화하여 회원 16만명을
확보하고 신생활 운동을 실천하도록 하는 한편 애국심 고취에도 전력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이용구는 손병희를 배신하고 친일단체인 유신회와 합하여
일진회를 조직하고 더 나아가 을사조약에 찬성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말았다.
이에 분개한 그는 이용구의 매국행위를 개탄하면서 즉시 귀국하여
이용구를 비롯한 친일분자들을 축출하고 더 이상의 불행을 막기 위하여
정교분리를 천명하고 교명에 대한 사후대책을 강구하였다.
[생가와 안내판 전경]
[민족대표 33인]
손병희(孫秉熙),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임예환(林禮煥), 나인협(羅仁協),
홍기조(洪基兆), 박준승(朴準承), 양한묵(梁漢默), 권병덕(權秉悳), 김완규(金完圭),
나용환(羅龍煥), 이종훈(李鍾勳), 홍병기(洪秉箕), 이종일·(李鐘一), 최린(崔麟),
이승훈(李昇薰), 박희도(朴熙道), 이갑성(李甲成), 오화영(吳華英), 최성모(崔聖模),
이필주(李弼柱), 김창준(金昌俊), 신석구(申錫九), 박동완(朴東完), 신홍식(申洪植),
양전백(梁甸伯), 이명룡(李明龍), 길선주(吉善宙), 유여대(劉如大), 김병조(金秉祚),
정춘수(鄭春洙), 한용운(韓龍雲), 백용성(白龍城).
[안내판 글 내용]
[손병희선생님의 사당과 동상]
1918년 민족자결주의의 영향과 연합국의 승리에 의한 국제정세의
전망을 포착한 그는 천도교 측의 대표로 3·1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했다.
그 주요내용은 독립운동을 대중화하고 일원화 하여야하며 방법은
비폭력이어야 한다는 중대한 합의를 하고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하였다.
1919년 2월 27일 밤 천도교 직영의 보성사에서 독립선언문 2만 1천매를 인쇄하였다.
이튿날 손병희는 가회동 자신의 집에 민족대표 33명을 소집,
거사를 재확인하고 이번의 의거는 민족적 지상과업임을 전제한 뒤
총의에 의지하여 성취될 것을 굳게 믿는다고 격려 고무하였다.
또한 독립선언식을 파고다공원에서 할 경우 많은 불상사가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부근 태화관에서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하는 등 33명 민족대표의 필두로서
3·1운동 당일의 계획을 완료하였다.
[가까이서 본 선생의 동상]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는 긴장과 신념과 열정이
교차하는 가운데 민족대표 33명 중 29명이 예약한 방에 모였다.
이때 독립통고서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서영환에 의해 조선총독부에
제출하였는데 이때 파고다 공원에 모여 있던 학생들은 만세장소 변경에 당황하고 항의하는 소동도 있었다.
오후 3시 손병희의 제의로 한용운이 독립운동의 결의를 다짐하는 간략한
인사에 이어 그의 선창으로 만세 3창을 불렀으며 독립선언문 낭독으로 식은 15분 만에 끝났다.
경찰이 오자 의연하게 붙들려 갔으며, 파고다 공원에 모여 있던
수천 명의 학생들은 때를 맞춰 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었다.
[의암 손병희선생님의 생가]
일본경찰에 검거된 그는 1920년 10월 징역 3년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1년 8개월만에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상춘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1922년 5월 19일
향년 62세로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서거하였다.
묘소는 서울 도봉구 우이동에 있으며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961년 충청북도 문화재 보존회에서는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그가 태어난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에 유허비를 건립하였으며 그의 생가는 1979년 충청북도 기념물 제30호로 복원 건립하였다.
[인증 샷]
선생이 태어난 생가는 정면 4칸, 측면 1칸반의 초가집으로
1971년에 해체 보수하였고 1961년에 탄신 100주년을 맞아 세운 유허비가 있다.
빨리 나오지 않고 뭐하느냐는 독촉에 서둘러 나오는
제 모습을 앞서 간 남편의 디카에 쏘옥 담았네요.^^
[의암 선생님 영정을 모신 의암영당]
그는 심사숙고 끝에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동학의
참신한 정신을 되살리며 본래의 종교운동을 주창하였다.
이를 위하여 동학의 근본인 인내천사상을 일깨워
"사람이 곧 하늘이니 지금의 세상이 이와같이 혼란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 혼탁한 때문이다."
라고 하며 먼저 사람의 마음을 고쳐 안정시켜야 된다고 연설하였다.
감동한 많은 사람들이 천도교로 몰려 그 수는 날로 늘어만 갔다.
이에 힘입은 그는 출판사 보성사를 설립하고 천도교 월보를 발간하여 천도교 교세 확장에 전력하였다.
한편 민족혼을 일깨우고 독립정신을 함양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교육임을
깨닫고 1909년 보성전문학교와 중학교, 소학교 그리고 교육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특히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교육의 남녀평등을 주장하였다.
[영당에 모신 선생의 영정]
[사당과 생가 모습]
전국에서 상경하여 대기하던 시민과 민중이 가담하자 독립의
의지와 열기는 더욱 고조되었으며 즉시 전국적으로 확대 파급되었다.
전국 각지에서는 1년여나 계속 만세운동이 일어났으며 해외 각지에서도
이 소식에 자극을 받아 3월 10일 이후 만주, 미주, 중국, 일본 등지에서도 국내 3·1운동에
호응하여 만세시위 운동이 일어났다.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고 민족의 자주독립을
달성하고자 민족 전체가 봉기한 세계사적 대 사건이었다.
따라서 이 3·1독립운동은 남녀, 빈부, 귀천, 지연, 학벌, 문벌 등을
초월한 전 민족의 자주독립을 절규한 민중운동이었다.
[앝은 언덕에 세워진 선생님을 기리는 유허비]
배짱과 의협심이 많은 그는 벌써 지도자로서의 큰그릇다운 대범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양반세도가는 꺾고 잔반 허약자는 도와주는 것이 그의 생리적 일상 행동이었다.
17세 때 괴산에서 修信使(수신사)가 어떤 사람의 상투를 말꼬리에 매어서 학대하는
참상을 보고 마부를 덮쳐 구해준 일이나, 20세때 음성에서 전염병으로 죽은 시체를
5일간이나 방치해둔 것을 보고 즉시 염습하여 후장해 준 일은 칭송을 한 몸에 받기에
충분하였다.
청주 藥令市(약령시)에 갔다가 돈 3백량을 습득, 잃어버린 사람을 기어이 찾아준 일도
있었으며, 21세때 초정 약수터에서 양반이 약수를 독점하고 있자 즉시 달려가 그들을
쫓아버리고 뒷전에서 겉돌고 있던 힘없는 백성-민중들에게 약수를 대준 것 등은 정의로운
젊은이 손병희의 티 없이 맑은 정의의 모습을 알려주는 일화거리라 할 수 있다.
[손병희선생님 부모님 묘소]
부모님 묘소가 50m쯤 가면 있다기에 찾았지만, 어디에도 묘소다운 곳이 보이지 않는다.
기념관 뒤쪽에 있는 앝은 봉분 둘 풀이 너무 우거져 처음엔 묘소가 아닌가 했다.
설마, 저곳이야 아니겠지...더운 한 낮 땀을 비오듯 흘리며 이리 저리 찾아다니는
옆지기를 보며, 안타까워 살며시 전화를 했다.
들어오며 가져온 유인물에 적힌 관리소 전화번호로....
그랬더니, 그곳이 맞다고 한다.
전화로 옆지기에게 찾았으니 내려오라고 연락을 했다.
옆지기가 미쳐 내려오기 전에 관리인이 먼저 도착했다.
묘를 찾으시는 분이 맞으신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했다.
좀 있으니 옆지기도 내려오고, 함께 들은 이야기는...
손병희선생님 기념관과 사당 생가를 보존하고 관리하기에도 빠뜻한 국고로...
부모님 묘까지는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다는 말씀이다.
얼마전에 풀도 깍아드렸는데, 하루이틀 지나면 또 다시
한번도 안해드린것 처럼 풀이 무성하다며...미안해 하신다.
옆지기 말로는 음지며, 습기가 많아서 그렇다고 하며,
건물 바로 뒤에 있는 묘소 그런곳에 묘를 쓰면 안된다고 안타까워한다.
절손이 되어 후손도 없으니, 누가 관리를...할까??
아드님 기념관 바로 뒷편에 자리하고 누웠으니 행복하실것 같다고 혼자서 자위해본다.
처음부터 그 자리였냐는 옆지기 말에 처음엔 그곳이 아니였는데,
옮겨놓고 나서 기념관이 바로 앞에 세워지게 되었다고 한다.
기념관 그늘에 가려 그늘이 졌지만, 아드님의 그늘이라 생각하시고 편히 주무시옵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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