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골목과 두사충 뽕나무골목

2021. 6. 1. 06:00문화산책/여러 종류의 민속자료

[이상화 고택쪽에서 담은 좌측 골목길 전경]

 

이상화 고택과 서상돈 고택을 보신 후 좌측 골목길로

접어들면, 대구 중구의 문화재를 소개하는 포스터가 붙어 있다.

 

[이상화 고택과 마주보고 있는 서상돈 고택쪽 전경]
[화단에 핀 고들베기 / 꽃말 / 순박함]
[중구 문화재 현황을 사진으로 담아 전시해 놓은 벽면 전경]

 

중구 문화재 현황의 포스터를 보시고 어디부터 어디까지

들려봐야겠다는 곳을 정해서 들려보시는 것도 좋으실 듯 합니다.

 

[중구의 문화재 현황도 / 대구달성 / 계산동성당]
[구 대구의학전문학교 / 구 도립대구병원 / 구 사범학교 본관과 강당]
[대구 동산병원 구관 / 대구화교협회 / 대구 구 교남UMCA회관]
[삼덕초등학교 관사 / 선화당 / 징청각]
[선교사 스위츠 주택 / 선교사 챔니스 주택 / 선교사 블레어 주택]
[성모당 / 대구제일교회 / 샬트르성바오로 수녀원 성당]
[남산초등학교 강당 / 계성학교 아담스관 / 계성학교 맥퍼슨관]
[계성학교 핸더슨관 / 구 대구상업학교본관 / 한국산업은행 대구지점]
[금보 / 건들바위 / 대구향교 대성전]
[관풍루 / 성 유스티노 신학교 /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원 고미넷관]
[전 윤효전 초상 / 윤희손 초상 / 태을산분정아국주군분야도]

 

어때요.

맘에 정해 보셨나요.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중구 문화재 현황을 사진으로 담아 전시해 놓은 벽면]
[중구 문화재 현황을 사진으로 담아 전시해 놓은 벽면 전경]

좌측에 보이는 건물이 서상돈 고택

골목길 끝에 보이는 건물이 이상화 고택입니다.

 

골목길을 조금 더 나아가면 지금은 '바보주막'이 되었습니다만

대문앞쪽에 붙어 있는 안내판을 보시면 대단한 인물의 고택을 만날 수 있다.

독립운동가 李相定(이상정,1897~1947)장군과 權基玉(권기옥,1901~1988) 여사의 고택입니다.

 

[이상정 고택(바보주막) 전경]

 

이상정 장군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이상화 시인의 맏형이며,

중국군의 고위 장성이었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참여하여 항일 한중연합을 조율하면서

항일운동을 이어갔으며, 광복 후엔 중국의 한인들 귀환에 애쓰시다가 1947년 9월 귀국,

10월에 뇌일혈로 안타깝게도 이른 나이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래 두 안내판을 읽으보시면 좀 더 상세히 알 수 있습니다.

 

[이상정 장군 고택 안내글]

 

이상정 장군은 민족 시인 이상화, 역사학자 이상백 교수, 문필가이자

수렵인인 이상오 형제의 맏형으로, 중국에서 '이연호, 이직'이라는 별칭을

사용해 그의 독립운동 행적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합니다.

 

[이상정 장군 고택 안내 글 내용]

 

부인 되시는 권기옥 여사도 학생시절 비밀결사 송죽회 가입과

군자금 모집활동, 평양에서의 만세운동 참가, 중국 망명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추천으로 중국 비행학교를 수료하고 중국군 소속으로 활동했으며..

이때에 이상정 장군과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다 합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도 유명한 독립운동가이기도 하시죠.

 

[이상정 장군(바보주막) 고택]

 

바보주막은 故(고)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고 추억하는 사람들이

조합원이 되어 만든 '협동조합 다문'에서 직영하는 봉하막걸리 전문점으로,

모듬전(바보전), 파전, 문어, 오뎅탕, 두부김치 등의 안줏거리와 봉하막걸리를 파는 주막집이다.

 

이상정 장군 고택은 1920년 경에 지은 한옥 골기와집으로, 안채, 아래채,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다.

 

[박기돈 고택(안빛고을) 전경]

 

이상정 고택(바보주막)과 담하나 사이의 자리에는

박기돈(국채보상운동을 하신) 고택도 자리하고 있다.

 

이곳도 역시 고택이라기보다는 이젠 '안빛고을' 식당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곳이지요.

 

[박기돈 고택 안내 글]

 

晦山(회산) 朴基敦(박기돈, 1873~1947)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며 서예가이다.

 

대구지역의 대표적 근대 문화예술인으로 꼽힌다.

합천 해인사 八萬大藏經(팔만대장경) 편액을 쓴 그는 일제 강점기

석재 서병오와 함께 영남의 양대 서예가로 우뚝했고 대구상무소(현 상공회의소)

초대 소장을 역임했다.

 

[박기돈 고택(안빛고을)]

 

서울 출생인 박기돈은 20세 무렵부터 스승인

시암 이직현의 문하에서 시서화 예술의 소양을 쌓았다.

 

29세의 나이로 대한제국 양지아문 양무위원을 역임하며 관직에

첫 발을 디뎠고, 1905년 을사늑약 이전까지 서울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1906년 대구에 정착한 후 지역의 상공업 진흥에

힘쓰며 경제인으로 활동하며 대구상무소 초대 소장을 지냈다.

또 국채보상운동을 비롯해 애국 계몽 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두사충과 뽕나무골목 벽화 전경]

 

두사충은 중국사람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때

풍수지리 전문가로 그의 역할은 명군이 진군할 陣(진)

치는 자리를 잡아주는 것이었다 합니다.

 

한반도의 혈맥을 끊으라는 이여송의 명을 받아서 따르다 보니

정작 陣(진) 자리를 잡는데 소홀히 하다보니 1593년 벽제관 전투에서

명이 왜군에게 대패해서 그 책임을 추궁당해 죽을 위기에 처했답니다.

 

꼼짝없이 죽게 된 그를 조선의 재상인 약포 정탁 선생과 명군 접반관이자

도체찰사 서애 류성룡 선생의 종사관으로 있던 벽오 이시발 선생이 힘써 구명해서

목숨을 건질 수 있게 되었답니다.

 

두사충 장군은 후에 전공을 살려 약포 정탁과 벽오 이시발 선생의 집터와

묘자리를 명당에 잡아주어 보은했으며, 조선의 혈맥을 끊는 것을 그만두고

조선에 우호적인 인사로 변하였다 합니다.

 

[ 두사충의 뽕나무 사랑이야기]

 

전쟁 후에 두사충 장군은 후금의 누르하치가 일어나고 명이 쇠퇴하는

상황에서 명의 앞날을 예견하고는 사위 나학천과 두 아들을 데리고

조선으로 들어와 귀화해 버립니다.

 

[두사충과 조선여인]

 

대구의 명당에 자리 잡았는데, 경상감영이 상주에서 대구로 옮겨오자

집터를 반납하고 인근의 계산동에 자리잡고 집터 주변으로 뽕나무를 많이 심었다.

 

처도 두고 조선에 와서 오래 지내다 보니, 두사충 장군은 외로움을 타기 시작했고,

뽕잎을 따다가 우연히 마주한 이웃집 미모의 아낙네에게 반하는 바가 되어 속앓이를 했답니다.

 

[두사충과 뽕나무골목 벽화 전경]

 

그런 아버지를 지켜보던 아들이 이웃집을 찾아 아낙네를 만나보니

그녀도 청상과부로 혼자 사는 처지, 두사충 장군에게 마음이 있었답니다.

덕분에 이들의 사랑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두사충 장군은 조선에 귀화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조국인 명과 두고온 가족을 잊지 않았답니다.

 

계산동에서 대구의 대덕산 아래 다시 집터를 옮기고, 잘 보이는 곳에 단을

쌓아두고 매월 초 황제가 있는 북쪽을 향해 배례하였으며, 명을 그리워한다고

호를 慕明(모명)이라 했고, 그가 살던 동네도 大明(대명)이라 하였다.

 

여기에서 대구 大明洞(대명동)의 지명이 유래했다합니다.

 

[두사충과 뽕나무골목]
[두사충과 뽕나무골목 안내 글]
[이순신장군과 두사충의 우정]

 

두사충 장군의 매부가 명의 수군 도독인 陳璘(진린)이라

그를 통해 충무공 이순신 제독과도 교분을 트게 되고,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이순신 장군이 두사충을 만나서 지어준 시가 있다.

'奉呈杜僕射(​봉정두복야)'라는 제목인데, ‘복야’는 명나라 때는

사용되지 않던 벼슬이지만 높여 불러서 그런 호칭을 붙였다하네요.

 

[이순신장군과 두사충의 우정]

 

나중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게 되자,

두사충 장군은 충무공 이순신 제독을 위해 묘자리도 잡아 주었다합니다.

 

[奉呈杜僕射(​봉정두복야) / 이어 붙이기 편집]
[이순신장군과 두사충의 우정 안내 글]
[하루 천냥이 나오는 명당]

 

풍수를 잘 보는 것으로도 유명해서 귀하한 후

지금의 경상감영공원 하루에 천냥을 번다는 명당자리에 살았다.

이곳이 풍수에 좋은 자리였던 것인데, 너무 좋았던 모양으로 경상감영이

들어서는 바람에 이사를 가야만 했다.

 

두사충이 원래 살던 집에서 이사한 곳이 대구 계산동이었다.

두사충은 이곳에 뽕나무를 많이 심었다.

그 뽕나무가 인연이 되어 옆집 아낙과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다.

 

두사충은 여러 양반들의 집터, 묘터를 잡아주고

'慕明遺訣(모명유결)' 이라는 풍수서를 지어서 자신의 지식을 전했다.

 

[하루 천냥이 나오는 명당 안내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파병온 명나라 장군 두사충의 이야기가 있는 골목이다.

 

그는 이곳에 뽕나무를 심어 생업을 이어나갔다고 하는데 지금도 이

일대는 뽕나무 골목으로 불리며 두사충에 관련된 설화들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근대시대에 대구를 대표하는 예술가인 시인 이상화, 화가 이인성,

소설가 현진건 등이 이곳에 모여 살아 예술가 골목으로 불리기도 한다.

 

소개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