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8. 30. 06:05ㆍ문화산책/정자와 누각
소재지 :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유등 1리
[柳湖蓮池(유호연지)와 君子亭(군자정) 안내판]
청도 팔경중의 명승지이며, 전국 명승지 百選(백선) 중의 한곳인
이곳은 固城李氏(고성이씨) 청도 입향조 慕軒公(모헌공) 諱(휘) 育(육)선생이
백형 쌍매장 휘 윤 중형 망헌공 휘 주 형제들과 점필재 김종직 선생사화에
부친이 부관참시 되는 등 가문이 수난을 당하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안동에서
두형의 유배지인 거제와 진도로 문후차 왕래하던 중 산수수려하고 生利(생리)가
넉넉한 이곳 유곡지에 흥해인 죄자순의 딸과 혼인하여, 전거하며 신라지라 불리던
못을 깊이 2미터 넓이 7만여평방미터, 둘레 700여 미터로 파고 넓혀 연을 심고
지명을 유호연지라 이름지었다.
위 안내판글을 초장부분만 옮겨 적어 보았습니다.
[固城李氏世居地(고성이씨세거지) 碑(비)]
무오사화를 피해 고성이씨들이 청도로 이주하면서
고성이씨 세거지지가 되었으며, 유호연지(또는 유등연지)도
고성이씨의 개인 소유지라 한다.
[입구에서 담은 君子亭(군자정) 전경]
君子亭(군자정)은 인공적인 섬위에 세워져 있으며,
다리를 건너 一鑑門(일감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또 군자정 양편으로 작은 두개의 섬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들 섬 모두에는 버드나무가 심어져 있다.
[一鑑門(일감문)]
新羅池(신라지)라 불리던 이 연못을 넓혀 柳湖(유호)라 이름지은
조선 중종때의 慕軒(모헌) 李育(이육).
다섯 형제 중 넷째인 모헌의 형제들은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들로
모두 관직에 나아갔으나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인하여 죽거나 유배되고
혹은 慕軒(모헌)처럼 은둔하게 되었다.
고향 안동을 떠나 山不高而秀麗(산은 높지 않으나 수려하고)
地不廣而肥沃(땅은 넓지 않으나 비옥한) 청도 유호에 은둔하게 되었다.
[君子亭(군자정) 현판]
[君子亭(군자정) 전경]
연 밭을 조성하고 군자정을 지은 이때가 1531년이라한다.
연꽃은 풍류의 대상이자 군자의 상징이다.
중국 북송시대 濂溪(염계) 주돈이는 모란을 부귀한 자에 비유하고,
국화는 隱士(은사)에 비유했으며 연꽃은 군자에 비유했다.
비록 몸은 주류에서 쫓겨나 은둔하게 되었으나
연꽃처럼 청정한 군자 적인 삶을 살기로 하셨던것은 아닌지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君子亭(군자정) 전경 2]
[慕軒精舍(모헌정사) 현판]
[慕軒精舍(모헌정사)]
君子亭(군자정)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1915년 중창한 후 수차례의 중수를 거쳤으며,
현재의 건물은 1970년에 중건한 것을 1989년 새로 중수한 것이다.
君子亭(군자정)이란 이름은 송나라 때 濂溪(염계) 주돈이
모란을 富貴(부귀), 국화는 隱士(은사), 연꽃은 君子(군자)에
비유하였는데, 연지안에 군자정을 지은 慕軒(모현)이 주돈이의 정신을
이어받아 연꽃처럼 청정한 君子(군자)를 추구했기에 정자 이름을
君子亭(군자정)이라 하였다.
[君子亭(군자정) 내부 편액]
군자정 내부에 걸린 편액들을 소개 합니다.
[君子亭(군자정)과 유호연지 전경]
안동에서 내려와 이곳 청도에 정착한 그는 이전부터 있던
작은 연못을 넓혀 지금과 비슷한 규모로 만들어 '柳湖(유호)'라
이름 붙이고, 연을 심어 연밭을 조성한 뒤 1531년 연못가에
君子亭(군자정)를 지어 후학을 가르치고 선비들과 학문을
논하며 일생을 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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